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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왜 우리는 고난을 회피하는가? 예수 믿으면 고난이 사라지는가, 오히려 고난을 당하는가? 우리는 환난과 고난을 제거해달라고 얼마나 기도했던가!
● 하지만 고난 자체가 길인 경우, 고난을 제거하면 길이 사라진다!
● 사랑 없는 믿음과 소망이 울리는 꽹과리이듯, 고난 없는 기쁨도 울리는 꽹과리이다!
[해제]
이 글은 키르케고르가 1848년에 저술한 『기독교 강화』 제 2부 ‘고난의 싸움 중에 있는 마음의 상태 (Stemninger i Lidelsers Strid)’를 번역한 것이다. 전체 4부로 구성 된 『기독교 강화』 중에서 이 강화는 무엇보다 고난당하는 자의 ‘기쁨’을 다루고 있다. 역자는 키르케고르의 고난을 주제로 한 강화가 기독교 문학의 백미(白眉)라고 생각한다. 이 강화는 고난에 대한 엄청난 통찰이 있다. 독자들은 이 글을 읽으면서 키르케고르가 제시하려는 기쁨이 어떤 것인지, 고난당하는 자의 기쁨이 다른 기쁨과 어떤 점이 다른 것인지 생각해보라.
사람들은 고난을 싫어한다. 그래서 무엇보다 신앙의 힘으로 고난을 극복하고자 한다. 하나님 앞에 나아가 고난, 역경, 환난을 제거해달라는 기도를 무엇보다 간절하게 한다. 이런 기도의 이면에 숨겨진 생각을 보면, 고난이 혼합된 기쁨은 아직 완전하지 않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하나님 나라의 기쁨을 맛보기 바란다. 이 기쁨은 모든 불순물이 제거된 순전한 기쁨이라는 것이다. 이 기쁨에는 세상의 어떤 고난도 없는, 그야말로 기쁨 밖에는 존재하지 않는다. 하지만 이런 생각은 그의 작품에서 박살나게 될 것이다. 바로 이 책이다.
독자들 중에 고난을 제거하는 방법을 얻기 위해, 남은 생애 가운데 고난 없이 하나님께서 주신 기쁨을 찾기 위해, 이 책을 선택했다면 아마도 큰 실망을 하게 될 것이다. 이 책은 고난을 제거할 마음이 없기 때문이다. 그렇지 않다면, 이 책은 독자들에게 신선한 충격을 안겨줄 것이다.
결론적으로 말해, 키르케고르는 고난을 제거할 마음이 없다. 더 정확히 말해, 고난을 기독교의 기쁨 속에 제거 불가능한 요소로 남겨두기를 바란다. 믿음, 소망, 사랑 그 중에 제일은 사랑이다. 사랑 없는 믿음과 소망은 울리는 꽹과리이듯이, 고난 없는 기쁨도 울리는 꽹과리다.
이 작품에는 등장하지 않지만, 『고난의 복음』에 나오는 이야기를 인용하자면, 환난의 길, 고난의 길은 잘못된 표현이다. 이것은 기독교를 착각하도록 부추긴 대표적 표현이다. 아니, 이 표현은 무한히 바뀌어야 한다. 고난의 길이라고 말할 때는 마치 고난과 길을 분리할 수 있을 것처럼 보인다. 그래서 기도실에 가서 기도했던 것이다. 나의 삶에, 나의 인생길에 고난을 제거해달라고 기도실에서 매달렸던 것이다.
하지만 명심하라. 기독교는 고난 자체가 길이다. 바로 이것이 기독교가 말하는 진리이신 그분이 가신 길의 본질이다. 고난 자체가 길인 경우, 고난을 제거하면 길이 사라진다. 따라서 고난은 이 길을 가는 자에게 필연적이다. 결코 제거할 수 없을 뿐더러 제거하기 바라는 것은 말 그대로 지옥행 열차를 타겠다고 결심한 것과 같다. 하지만 우리의 삶 속에서 우리는 얼마나 고난을 제거해달라고 기도했는가? 인간적으로 말해, 고난을 원할 사람이 몇이나 되겠는가! 이것이 맨 정신으로 가능한가? 물론, 키르케고르는 고난을 원하는 것은 맨 정신으로는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세상에서 고난당하기를 원했던 사람이 있을 수 있다. 예를 들어, 일제 강점기에 독립을 위해 투쟁하기를 선택했던 독립 운동가들도 고난당하기를 소원한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키르케고르는 이런 사람들도 고난당하기를 원한 것 같지만 실상은 싸우기를 원했다는 것이다. 이런 사람들은 쾌락을 즐기며 인생을 잠에 빠져 살기를 원치 않았다. 노력 없이 이익을 얻기 위해 재치가 넘치는 삶을 원하지도 않았다. 그들은 싸우기를 원했다. 하지만 싸움을 위해 싸우기를 원하는 것은 결코 고난당하기를 원치 않는 것이다. 주의하라! 이것은 최고의 것을 닮은 정반대의 것이다.
키르케고르는 이 부분에 대하여는 더 통렬하다. 이 사람들은 자신이 얼마나 강한 자인지, 싸움으로써 획득한 명예를, 암묵적으로 그 증거를 갖기를 원했다는 것이다. 싸우면서 강자가 됨으로써, 싸우기 위한 지속적 몸부림을 통해서, 지속적으로 자신의 자존심을 새롭게 하기를 원했다는 것이다.
그들은 평안과 고요 속에 정착하기를 원치 않았다. 싸움에 대한 열망이 너무 컸다. 싸움이 이제 끝났다는 어떤 소식도 듣고 싶어 하지 않았다. 활시위의 자존심은 오직 한 가지, 전투에서 당겨지기를 열망하듯이, 아무리 많은 승리를 얻어도 느슨해져 창고에 처박히는 것, 이 한 가지에 의해 괴롭힘을 당하듯이, 그들도 역시 싸우는 중에, 전투의 날에,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분투의 긴장 속에, 전투의 소용돌이 속에 살고 죽기를 원했다.
따라서 지혜로운 말인 ‘고난당하는 것’, ‘고난당하기를 소원하는 것’이라는 말을 사용했을 때, 이것은 오해, 기만, 착각이었다. 누군가 그에게 그의 말을 반복하고 “그래, 너는 올바른 선택을 한 거야.”라고 말한다면, 그리고 이제 그에게 그 말들이 함의하고 있는 것을 설명했다면, 세상을 향해 싸우기 위해 소원하고 도전했던 저 공격적인 사람들도 아마도 용기를 잃게 되었으리라. 싸움에 빠지는 대신에, 그는 아마도 고난당하는 데에 빠졌으리라.
고난당하기 원하는 것과 고난을 선택하는 것, 이것은 인간의 마음에 결코 일깨우지 못했던 소원이다. 이것을 생각한 사람은 자기 자신을 속이고 있을 뿐이다. 고난에 대한 생각과 고난의 기쁜 복음을 파악하기 위해서, 고난을 견디고 실제적으로 고난으로부터 유익을 얻기 위해서, 고난을 선택하고 이것이 실제로 영원한 행복으로 이끄는 지혜가 되기 위해, 사람은 이 길을 걸으신 예수 그리스도가 필요하고, 그분께 배워야 한다.
● 하지만 고난 자체가 길인 경우, 고난을 제거하면 길이 사라진다!
● 사랑 없는 믿음과 소망이 울리는 꽹과리이듯, 고난 없는 기쁨도 울리는 꽹과리이다!
[해제]
이 글은 키르케고르가 1848년에 저술한 『기독교 강화』 제 2부 ‘고난의 싸움 중에 있는 마음의 상태 (Stemninger i Lidelsers Strid)’를 번역한 것이다. 전체 4부로 구성 된 『기독교 강화』 중에서 이 강화는 무엇보다 고난당하는 자의 ‘기쁨’을 다루고 있다. 역자는 키르케고르의 고난을 주제로 한 강화가 기독교 문학의 백미(白眉)라고 생각한다. 이 강화는 고난에 대한 엄청난 통찰이 있다. 독자들은 이 글을 읽으면서 키르케고르가 제시하려는 기쁨이 어떤 것인지, 고난당하는 자의 기쁨이 다른 기쁨과 어떤 점이 다른 것인지 생각해보라.
사람들은 고난을 싫어한다. 그래서 무엇보다 신앙의 힘으로 고난을 극복하고자 한다. 하나님 앞에 나아가 고난, 역경, 환난을 제거해달라는 기도를 무엇보다 간절하게 한다. 이런 기도의 이면에 숨겨진 생각을 보면, 고난이 혼합된 기쁨은 아직 완전하지 않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하나님 나라의 기쁨을 맛보기 바란다. 이 기쁨은 모든 불순물이 제거된 순전한 기쁨이라는 것이다. 이 기쁨에는 세상의 어떤 고난도 없는, 그야말로 기쁨 밖에는 존재하지 않는다. 하지만 이런 생각은 그의 작품에서 박살나게 될 것이다. 바로 이 책이다.
독자들 중에 고난을 제거하는 방법을 얻기 위해, 남은 생애 가운데 고난 없이 하나님께서 주신 기쁨을 찾기 위해, 이 책을 선택했다면 아마도 큰 실망을 하게 될 것이다. 이 책은 고난을 제거할 마음이 없기 때문이다. 그렇지 않다면, 이 책은 독자들에게 신선한 충격을 안겨줄 것이다.
결론적으로 말해, 키르케고르는 고난을 제거할 마음이 없다. 더 정확히 말해, 고난을 기독교의 기쁨 속에 제거 불가능한 요소로 남겨두기를 바란다. 믿음, 소망, 사랑 그 중에 제일은 사랑이다. 사랑 없는 믿음과 소망은 울리는 꽹과리이듯이, 고난 없는 기쁨도 울리는 꽹과리다.
이 작품에는 등장하지 않지만, 『고난의 복음』에 나오는 이야기를 인용하자면, 환난의 길, 고난의 길은 잘못된 표현이다. 이것은 기독교를 착각하도록 부추긴 대표적 표현이다. 아니, 이 표현은 무한히 바뀌어야 한다. 고난의 길이라고 말할 때는 마치 고난과 길을 분리할 수 있을 것처럼 보인다. 그래서 기도실에 가서 기도했던 것이다. 나의 삶에, 나의 인생길에 고난을 제거해달라고 기도실에서 매달렸던 것이다.
하지만 명심하라. 기독교는 고난 자체가 길이다. 바로 이것이 기독교가 말하는 진리이신 그분이 가신 길의 본질이다. 고난 자체가 길인 경우, 고난을 제거하면 길이 사라진다. 따라서 고난은 이 길을 가는 자에게 필연적이다. 결코 제거할 수 없을 뿐더러 제거하기 바라는 것은 말 그대로 지옥행 열차를 타겠다고 결심한 것과 같다. 하지만 우리의 삶 속에서 우리는 얼마나 고난을 제거해달라고 기도했는가? 인간적으로 말해, 고난을 원할 사람이 몇이나 되겠는가! 이것이 맨 정신으로 가능한가? 물론, 키르케고르는 고난을 원하는 것은 맨 정신으로는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세상에서 고난당하기를 원했던 사람이 있을 수 있다. 예를 들어, 일제 강점기에 독립을 위해 투쟁하기를 선택했던 독립 운동가들도 고난당하기를 소원한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키르케고르는 이런 사람들도 고난당하기를 원한 것 같지만 실상은 싸우기를 원했다는 것이다. 이런 사람들은 쾌락을 즐기며 인생을 잠에 빠져 살기를 원치 않았다. 노력 없이 이익을 얻기 위해 재치가 넘치는 삶을 원하지도 않았다. 그들은 싸우기를 원했다. 하지만 싸움을 위해 싸우기를 원하는 것은 결코 고난당하기를 원치 않는 것이다. 주의하라! 이것은 최고의 것을 닮은 정반대의 것이다.
키르케고르는 이 부분에 대하여는 더 통렬하다. 이 사람들은 자신이 얼마나 강한 자인지, 싸움으로써 획득한 명예를, 암묵적으로 그 증거를 갖기를 원했다는 것이다. 싸우면서 강자가 됨으로써, 싸우기 위한 지속적 몸부림을 통해서, 지속적으로 자신의 자존심을 새롭게 하기를 원했다는 것이다.
그들은 평안과 고요 속에 정착하기를 원치 않았다. 싸움에 대한 열망이 너무 컸다. 싸움이 이제 끝났다는 어떤 소식도 듣고 싶어 하지 않았다. 활시위의 자존심은 오직 한 가지, 전투에서 당겨지기를 열망하듯이, 아무리 많은 승리를 얻어도 느슨해져 창고에 처박히는 것, 이 한 가지에 의해 괴롭힘을 당하듯이, 그들도 역시 싸우는 중에, 전투의 날에,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분투의 긴장 속에, 전투의 소용돌이 속에 살고 죽기를 원했다.
따라서 지혜로운 말인 ‘고난당하는 것’, ‘고난당하기를 소원하는 것’이라는 말을 사용했을 때, 이것은 오해, 기만, 착각이었다. 누군가 그에게 그의 말을 반복하고 “그래, 너는 올바른 선택을 한 거야.”라고 말한다면, 그리고 이제 그에게 그 말들이 함의하고 있는 것을 설명했다면, 세상을 향해 싸우기 위해 소원하고 도전했던 저 공격적인 사람들도 아마도 용기를 잃게 되었으리라. 싸움에 빠지는 대신에, 그는 아마도 고난당하는 데에 빠졌으리라.
고난당하기 원하는 것과 고난을 선택하는 것, 이것은 인간의 마음에 결코 일깨우지 못했던 소원이다. 이것을 생각한 사람은 자기 자신을 속이고 있을 뿐이다. 고난에 대한 생각과 고난의 기쁜 복음을 파악하기 위해서, 고난을 견디고 실제적으로 고난으로부터 유익을 얻기 위해서, 고난을 선택하고 이것이 실제로 영원한 행복으로 이끄는 지혜가 되기 위해, 사람은 이 길을 걸으신 예수 그리스도가 필요하고, 그분께 배워야 한다.
해제: 고난 중에 어떻게 기뻐할 수 있는가? · 16
Chapter 1 한 번 고난당하지만 영원히 승리하는 기쁨 · 43
Chapter 2 환난이 소망을 빼앗는 것이 아니라 소망을 구해오는 기쁨 · 79
Chapter 3 가난할수록 다른 사람을 더 부하게 할 수 있는 기쁨 · 105
Chapter 4 약할수록 당신 안에 하나님은 더 강하다는 기쁨 · 135
Chapter 5 시간에서 상실한 것을 영원히 얻는 기쁨 · 165
Chapter 6 ‘모든 것을 얻을 때,’ 나는 아무 것도 잃지 않는 기쁨 · 197
Chapter 7 역경이 형통인 기쁨 · 215
해제: 영원의 리트로넬로 · 243
Chapter 1 한 번 고난당하지만 영원히 승리하는 기쁨 · 43
Chapter 2 환난이 소망을 빼앗는 것이 아니라 소망을 구해오는 기쁨 · 79
Chapter 3 가난할수록 다른 사람을 더 부하게 할 수 있는 기쁨 · 105
Chapter 4 약할수록 당신 안에 하나님은 더 강하다는 기쁨 · 135
Chapter 5 시간에서 상실한 것을 영원히 얻는 기쁨 · 165
Chapter 6 ‘모든 것을 얻을 때,’ 나는 아무 것도 잃지 않는 기쁨 · 197
Chapter 7 역경이 형통인 기쁨 · 215
해제: 영원의 리트로넬로 · 243
성령을 받은 자들의 심령에 반드시 나타나는 현상이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 나라를 위해 자원하여 고난받는 자리로 가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 시대의 기독교는 신자들이 삶에서 겪는 고난을 효과적으로 제거하는 법을 가르치기 시작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 말씀에 역행하는 가르침입니다. 키르케고르는 이 부분에 있어 타협이 없습니다. 그는 방대한 지식과 날카로운 안목으로, 신자의 삶에 존재하는 고난이 어떤 역할을 하며, 왜 그것이 신자의 삶에 계속 실존해야 하는지를 분명하게 밝힙니다. 고난에 대해 말랑말랑한 가르침을 원하는 분들은 함부로 이 책을 읽지 마십시오. 심령에 큰 상처를 받을 가능성이 많습니다. 그러나 성경에서 말하는 고난의 본질을 더 선명하게 배우기 원하는 분들은 용기 내어 이 책을 잡으십시오. 자신의 인생에 놓여 있는 고난의 길을 감사함으로 걸어가기로 결단하게 되실 겁니다.
_ 김관성 목사(『본질이 이긴다』 저자)
이 책이 주는 해석에서 우리 인생은 시간과 영원이라는 하나님의 창조 아래 있다는 것이다. 삼차원의 인생을 살아가는 우리에게 영원한 세계를 준비하는 이 땅에서의 고난과 역경에 우리는 어떠한 자세가 필요한가? 직면하는 삶의 여정에 그리스도인이 마땅히 가야 하는 그 고난의 동참에 키르케고르를 통해 예수님의 고난을 다시 깊이 묵상하는 도움받기를 권면하며 추천한다.
_육근원 목사(글로벌비전채플 담임목사)
고난의 기쁨이 무엇인지 궁금하면 이 책을 찬찬히 들여다보라. 큰 상실을 경험했다면 이 책을 읽으라. 당신 안의 속사람이 날갯짓을 시작하는 것을 경험하게 되리라. 이창우 선생님의 노고에 감사하며 사명감을 가지고 키르케고르의 강화집들을 번역하는 그에게 깊은 존경의 마음을 전한다. 키르케고르의 《고난의 복음》과 《마음의 정결함》이 그의 친절하고 탁월한 번역으로 계속해서 출간되기를 기대한다.
_윤덕영 목사(키르케고르 학회 총무 · 삼성교회 위임목사)
대부분의 목사는 성경의 가르침을 바로 전달하고 있는지 점검합니다. 이 책은 그 동안 고난에 대하여 바르게 설교하였는지 돌아보게 합니다. 이 책은 고난에 대한 새로운 통찰을 줍니다. 그리고 고난에 대한 근시안적 관점에서 벗어나게 합니다. 고난을 영원이라는 시간의 관점에서 바라보게 합니다. “사람은 단 한 번의 고난을 당한다.” “영원의 관점 에서 고난은 신기루이다.” 고난에 대한 키르케고르의 설명은 깊은 울림을 줍니다. 번역한 이창우 목사의 노력에 경의를 표합니다.
_이영호 목사(부천침례교회 담임목사)
오늘날 철학자들은 물론하고 성서학자들도 관심두지 않는 이 많은 성경에 대한 키르케고르의 저작들을 오래전부터 외롭게 천착해온 한국의 학자가 있습니다. 그는 제가 사랑하고 아끼는 이창우 목사입니다. 이 목사는, 덴마크어를 배우고, 영어와 덴마크어로 키르케고르를 독해하고 나서 번역하고, 이를 온라인에 게시하고, 종국에는 종이책으로 출판하는 지난한 작업을 수행하고 있습니다. 그는 또한 각 책마다 해 제를 달고 있습니다. 그는 이 모든 작업을 지금까지 10년 넘게 혼자서 합니다.
독자제위께서는 이러한 몇 가지 배경을 염두에 두고 본 번역서를 읽는다면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이해가 깊어지는 동시에 그리스도의 제자로서의 자신의 믿음을 점검해보는데 지대한 감동을 받으실 것으로 확신하여 일독만 아니라 숙독을 권합니다.
_장동수 교수(한국침례신학대학교 신약학 교수)
값비싼 향수의 본질은 그것을 뿌렸을 때만 향기가 퍼지는 것이 아니라 밀폐된 병속에 갇혀 있을 때도 향기를 내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우리에게 주어진 영적재물은 전달함으로 다른 사람을 부요케 한다. 여기에 기쁨이 있다.
하나님은 전능하신 분이고 우리 인간은 피조물이다. 그런데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심으로 우리를 중요한 존재로 만드신다. 하나님의 사랑으로 가능해진 일이다. 그것이 하나님의 강함이다. 그 하나님의 강함이 우리에게 기쁨을 준다.
시간이라는 한계속에서 우리는 시간적인 것들, 일시적인 것들을 상실 한다. 그러나 영원한 것은 영원히 획득될 수 있다. 거기에 기쁨이 있다.
바람이 배를 목적지로 이끈다면 사람들이 그것을 역풍이라 불러도 선원에게 그것은 순풍이다. 역경은 목표로 인도한다. 따라서 역경이 형통이 될 수 있다. 거기에 기쁨이 있는 것이다.
《고난의 기쁨》에 담긴 키르케고르의 주옥같은 강화를 통해 그의 통찰력을 발견하는 계기가 되기를 바란다. 추천하며 일독을 권한다.
_조은식 교수(키르케고르 학회 회장 · 숭실대 교수)
_ 김관성 목사(『본질이 이긴다』 저자)
이 책이 주는 해석에서 우리 인생은 시간과 영원이라는 하나님의 창조 아래 있다는 것이다. 삼차원의 인생을 살아가는 우리에게 영원한 세계를 준비하는 이 땅에서의 고난과 역경에 우리는 어떠한 자세가 필요한가? 직면하는 삶의 여정에 그리스도인이 마땅히 가야 하는 그 고난의 동참에 키르케고르를 통해 예수님의 고난을 다시 깊이 묵상하는 도움받기를 권면하며 추천한다.
_육근원 목사(글로벌비전채플 담임목사)
고난의 기쁨이 무엇인지 궁금하면 이 책을 찬찬히 들여다보라. 큰 상실을 경험했다면 이 책을 읽으라. 당신 안의 속사람이 날갯짓을 시작하는 것을 경험하게 되리라. 이창우 선생님의 노고에 감사하며 사명감을 가지고 키르케고르의 강화집들을 번역하는 그에게 깊은 존경의 마음을 전한다. 키르케고르의 《고난의 복음》과 《마음의 정결함》이 그의 친절하고 탁월한 번역으로 계속해서 출간되기를 기대한다.
_윤덕영 목사(키르케고르 학회 총무 · 삼성교회 위임목사)
대부분의 목사는 성경의 가르침을 바로 전달하고 있는지 점검합니다. 이 책은 그 동안 고난에 대하여 바르게 설교하였는지 돌아보게 합니다. 이 책은 고난에 대한 새로운 통찰을 줍니다. 그리고 고난에 대한 근시안적 관점에서 벗어나게 합니다. 고난을 영원이라는 시간의 관점에서 바라보게 합니다. “사람은 단 한 번의 고난을 당한다.” “영원의 관점 에서 고난은 신기루이다.” 고난에 대한 키르케고르의 설명은 깊은 울림을 줍니다. 번역한 이창우 목사의 노력에 경의를 표합니다.
_이영호 목사(부천침례교회 담임목사)
오늘날 철학자들은 물론하고 성서학자들도 관심두지 않는 이 많은 성경에 대한 키르케고르의 저작들을 오래전부터 외롭게 천착해온 한국의 학자가 있습니다. 그는 제가 사랑하고 아끼는 이창우 목사입니다. 이 목사는, 덴마크어를 배우고, 영어와 덴마크어로 키르케고르를 독해하고 나서 번역하고, 이를 온라인에 게시하고, 종국에는 종이책으로 출판하는 지난한 작업을 수행하고 있습니다. 그는 또한 각 책마다 해 제를 달고 있습니다. 그는 이 모든 작업을 지금까지 10년 넘게 혼자서 합니다.
독자제위께서는 이러한 몇 가지 배경을 염두에 두고 본 번역서를 읽는다면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이해가 깊어지는 동시에 그리스도의 제자로서의 자신의 믿음을 점검해보는데 지대한 감동을 받으실 것으로 확신하여 일독만 아니라 숙독을 권합니다.
_장동수 교수(한국침례신학대학교 신약학 교수)
값비싼 향수의 본질은 그것을 뿌렸을 때만 향기가 퍼지는 것이 아니라 밀폐된 병속에 갇혀 있을 때도 향기를 내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우리에게 주어진 영적재물은 전달함으로 다른 사람을 부요케 한다. 여기에 기쁨이 있다.
하나님은 전능하신 분이고 우리 인간은 피조물이다. 그런데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심으로 우리를 중요한 존재로 만드신다. 하나님의 사랑으로 가능해진 일이다. 그것이 하나님의 강함이다. 그 하나님의 강함이 우리에게 기쁨을 준다.
시간이라는 한계속에서 우리는 시간적인 것들, 일시적인 것들을 상실 한다. 그러나 영원한 것은 영원히 획득될 수 있다. 거기에 기쁨이 있다.
바람이 배를 목적지로 이끈다면 사람들이 그것을 역풍이라 불러도 선원에게 그것은 순풍이다. 역경은 목표로 인도한다. 따라서 역경이 형통이 될 수 있다. 거기에 기쁨이 있는 것이다.
《고난의 기쁨》에 담긴 키르케고르의 주옥같은 강화를 통해 그의 통찰력을 발견하는 계기가 되기를 바란다. 추천하며 일독을 권한다.
_조은식 교수(키르케고르 학회 회장 · 숭실대 교수)
쇠얀 키르케고르
19세기 기독교 사상사의 가장 뛰어난 신학자. 실존주의의 선구자. 헤겔과 함께 종교 철학자로도 높이 평가되고 있다.
1813년, 덴마크 코펜하겐의 기독교 가정에서 7형제 중 막내 아들로 태어났다. 아버지의 강권으로 신학을 하는데 반감이 컸던 그는 방황하다가 1840년 <아이러니의 개념에 대하여>로 코펜하겐대학에서 신학 석사학위를 받았다. 1841년, 철학 박사학위 논문 <소크라테스와의 지속적 관계를 통해 본 아이러니의 개념>을 발표하고, 연인 레기네 올젠과 파혼한다. 그 영향으로 1843년『이것이냐 저것이냐』를 썼으며, 그후『반복』,『 두려움과 떨림』 등을 출간한다.
1844년에 발표한 심리학을 다룬『불안의 개념』, 소크라테스와 역설적 그리스도에 관한『 철학적 단편』이 있다. 이 과정에 ‘하나님의 스파이’라고 고백한 그는 기독교 정신에 귀기울이면서 실존하는 주체로서 하나님과의 관계에 몰두하였으며,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단독자’여야 한다고 강조한다.
1846년, 가명의 저서『철학의 부스러기』 또『철학적 부스러기에 대한 결론의 비학문적 후서』가 있으며, 그밖에 기독교의 본질을 각인시키는『사랑의 역사(役事)』,『그리스도교 훈련』,『 죽음에 이르는 병』, 『 자기 시험을 위하여』와 함께 읽어야 할 유고집『스스로 판단하라』 등이 있다. 그는 1855년 42살의 나이로 프레데릭 병원에서 숨졌다.
1813년, 덴마크 코펜하겐의 기독교 가정에서 7형제 중 막내 아들로 태어났다. 아버지의 강권으로 신학을 하는데 반감이 컸던 그는 방황하다가 1840년 <아이러니의 개념에 대하여>로 코펜하겐대학에서 신학 석사학위를 받았다. 1841년, 철학 박사학위 논문 <소크라테스와의 지속적 관계를 통해 본 아이러니의 개념>을 발표하고, 연인 레기네 올젠과 파혼한다. 그 영향으로 1843년『이것이냐 저것이냐』를 썼으며, 그후『반복』,『 두려움과 떨림』 등을 출간한다.
1844년에 발표한 심리학을 다룬『불안의 개념』, 소크라테스와 역설적 그리스도에 관한『 철학적 단편』이 있다. 이 과정에 ‘하나님의 스파이’라고 고백한 그는 기독교 정신에 귀기울이면서 실존하는 주체로서 하나님과의 관계에 몰두하였으며,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단독자’여야 한다고 강조한다.
1846년, 가명의 저서『철학의 부스러기』 또『철학적 부스러기에 대한 결론의 비학문적 후서』가 있으며, 그밖에 기독교의 본질을 각인시키는『사랑의 역사(役事)』,『그리스도교 훈련』,『 죽음에 이르는 병』, 『 자기 시험을 위하여』와 함께 읽어야 할 유고집『스스로 판단하라』 등이 있다. 그는 1855년 42살의 나이로 프레데릭 병원에서 숨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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