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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월 17일 “하인리히 불링거. 44년간 재세례파와 로마교 사이에서, 정부와 교회 사이에서”
오늘은 하인리히 불링거(Heinrich Bullinger, 1504–1575)가 별세한 날입니다. 1575년 9월 17일, 몇 편의 시편과 기도문을 암송한 불링거는 고요히 눈을 감았습니다. 불링거는 44년간 취리히에서 사역을 감당하며 츠빙글리의 개혁 작업을 이어나갔습니다. 스위스의 작은 마을에서 사제의 아들로 태어난 그는 쾰른대학에서 교부들과 종교개혁가, 인문주의자들을 연구하던 중 복음에 눈을 뜨게 되었습니다. 불링거는 취리히에서 츠빙글리를 만나 개신교 진영에 합류하게 되었고, 츠빙글리의 전사 후 취리히 교회의 주임사제로 임명되었습니다. 신학자이기 이전에 목회자였던 불링거는 7,000회 이상의 설교를 전했고, 81권의 저술과 12,000통 이상의 서신을 남겼습니다.
불링거는……츠빙글리의 후계자로 그의 성경 강해 방식과 개혁 정책을 포함하여 직분론, 성례신학, 즉 성찬과 성례를 적극 수용하였다. 여기서 그는 한편 가톨릭적 교제 혹은 축제 중심의 전통과 다른 한편 극단적인 재세례파의 견해를 거부하고 새롭게 개혁주의 전통을 수립하였다. 그러나……불링거는 칼빈의 예정론을 수용했으나 기독교 공화국 내의 두 통치 체제와 제네바의 교회 규율은 거부하였다. 그리고 에라스투스의 동맹자로 장로교 체제에 맞서 투쟁하였다. 동시에 토마스 카트라이트의 장로교 전통을 교황의 교권적이며 획일적인 체제의 새로운 형태로 보고 영국의 성공회 제도를 지지하였다. 권징에서 수찬정지를 반대하고, 모든 강제력을 세속 행정관에게 위임하였다……불링거는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과 언약 관계에 있다고 믿었다.[서요한, 『개혁신학의 전통』 (서울: 그리심, 2014), 257-58.]
불링거는 칼빈보다 영국 종교개혁에 더 큰 영향을 끼쳤습니다. 츠빙글리의 성찬론은 단순한 기념설이 아닌데(루터와의 논쟁 역시 ‘용어’에 대한 오해에서 기인), 불링거는 이를 계승하여 보다 개혁파적인 성찬론으로 발전시켰습니다. 취리히에서 재세례파(급진적 종교개혁)가 나왔음을 기억할 때, 불링거가 44년간 얼마나 많은 수고를 했어야 했는지를 짐작해볼 수 있습니다. 그는 로마교와 재세례파를 비판했고, 세속 정부와 교회 사이에 서서 균형을 맞추는 일에 탁월했습니다. 루터처럼 용맹스럽고, 칼빈처럼 정확하지는 않았지만 자기 자신이 되어 한 자리를 지켰던 불링거의 진가가 지금보다 더 드러났으면 좋겠습니다. 나의 취리히에서 오늘도 성실하게 하소서.
불링거는 성례가 하나님의 은혜의 도구로 이해될 수 있다는 생각을 결코 허락하지 않으려 했다. 왜냐하면 그렇게 이해될 때, 인간의 반응이 하나님의 구원 계획에 반드시 필요한 것이 되기 때문이었다……『디케이드』(Decades)에서 불링거는 다음과 같이 주장하였다. “주의 성찬에서 떡과 포도주는 그리스도의 참된 몸과 피를 나타내 보여준다. 떡이 사람에게 영양을 공급하고 힘을 주어 일할 수 있게 만드는 것처럼, 그리스도의 몸을 믿음으로 먹을 때 사람의 영혼은 만족을 얻어 경건의 의무를 행하기 위해 준비된다. 포도주가 갈등을 해소하며 사람의 마음을 즐겁게 만드는 것처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피를 믿음으로 마실 때 타는 듯한 양심의 갈증이 해소되며 성도들의 마음은 말할 수 없는 기쁨으로 가득 차게 된다."[Carter Linberg ed., The Reformation Theologinas, 조영천 역, 『종교개혁과 신학자들』 (서울: 기독교문서선교회, 2012), 324-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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