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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년 10월 30일 월요 새벽 경건회 [찬송: 하나님이 세상을 사랑하사, 설교: 마태복음 3장 1-6절, 열방을 위한 기도: 소말리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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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하나님이 세상을 사랑하사 독생자로 그 사랑 보이셨네
그 아들을 믿고 의지하는 자 영생을 얻게 되리라
2. 영생은 유일하신 하나님과 그 보내신 독생자를 앎이라
누구든지 영생을 누리는 자 주 안에 거함을 알리라
3. 우리 안에 사시는 성령님은 늘 소원을 두시고 행하시네
그 놀라운 비밀을 잃지 않고 주 안에 살면서 기뻐해


마태복음3:1-6

[현대인의성경]
1. 그 무렵 세례 요한이 유대 광야에서
2. '하늘 나라가 가까왔다! 회개하라!' 하고 외쳤다.
3. 예언자 이사야는 일찌기 이 요한을 가리켜 이렇게 예언하였다. '광야에서 어떤 사람의 외치는 소리가 들린다. 너희는 주를 위해 길을 준비하라. 그의 길을 곧게 하라.'
4. 요한은 낙타 털옷을 입고 허리에 가죽띠를 띠고 메뚜기와 산꿀을 먹고 살았다.
5. 그때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요단강 부근 모든 마을 사람들이 요한에게 나아와
6. 죄를 고백하고 요단강에서 세례를 받았다.

[NASB]
1. Now in those days John the Baptist came, preaching in the wilderness of Judea, saying,
2. "Repent, for the kingdom of heaven is at hand."
3. For this is the one referred to by Isaiah the prophet when he said, "THE VOICE OF ONE CRYING IN THE WILDERNESS, 'MAKE READY THE WAY OF THE LORD, MAKE HIS PATHS STRAIGHT!'"
4. Now John himself had a garment of camel's hair and a leather belt around his waist; and his food was locusts and wild honey.
5. Then Jerusalem was going out to him, and all Judea and all the district around the Jordan;
6. and they were being baptized by him in the Jordan River, as they confessed their sins.



소말리아: 위험 속에서도 사역을 감당하는 복음 전도자들을 보호해주시기를


=====3:1
그 때에 - 이 구절의 뜻은 (1) '결정적인 어느 때'(Hill)를 말할 수도 있고, (2) '예수와 그의 가족이 나사렛에 살던 무렵'(Broadus)을 뜻할 수도 있다. 마태는 구약에서 어떤 특정한 시점(時點)을 나타내던 표현 방법(창 38:1;출 2:11, 23;사 38:1)의 영향을 받아 뒤에 이어지는 기록들이 역사적 사실임을 강조하고자 이런 표현법을 사용한 것 같다. 한편 '그 때'는 2장과 약 30년의 차이가 있는 주후 28년 정도가 될 것으로 추측된다. 즉, 디베료 가이사(Tiberias Caesar) 재위 15년(눅 3:1, 2) 되던 해, 곧 세례요한 내지 예수의 나이가 30세 된던 때였다. 여기서 '30'이란 나이는 모세 율법에 의하여 공식적으로 제사장직을 수행할 수 있는 시기였던 것이다(민 4:3, 42-45). 이는 결국 율법의 완성자요 인류 구속의 과업을 실행키 위해 영원한 제사장으로 오신 예수의 사역을 인준해주는 하나의 중요한 증거 자료가 된다.
세례요한(* ,요안네스 호 배티스테스) - 히브리어 요하난(* )이란 이름에서 유래한 '요한'은 제사장이자, 유대의 지도자로서 B.C.106년에 사망한 요한 힐카누스(John Hyrcanus) 이래로 유대인들에게 흔히 사용되는 이름이었다. 이 이름은 신약에서 4, 5명 정도 등장하는데, 특히 본문에서 '요한'이란 이름 앞에 '세례'(Baptist)라는 표현을 사용한 것은 자주 나오는 다른 이름과 구별하기 위해서 일 뿐 아니라 그의 사역의 중점이 '세례'에 있었기 때문이다. 한편, 히브리인의 이름에는 (1) 할례명(이 이름은 거룩한 이름으로 종교적 목적과 의식에서만 사용한다)과 (2) 개인명(個人名, 즉 세속명으로서 일반적으로 통용되는 이름이다) 및 (3) 그밖에 한 개인에게 관련된 공적 임무, 정신적, 신체적. 신분적, 도덕적 특성을 일컫는 이름이 있었다. 여기 '세례 요한'이란 이름은 바로 (3)번의 공식 임무에 관련된 직능적(職能的) 이름으로 볼 수 있다. 유대의 역 사 역사가 요세푸스(Jesephus)도 '세례자 요한'이란 표현을 사용하였다. 한편 세례요한은 엄격히 말해서 율법 시대에 속한 자요, 죄를 책망하여 회개를 촉구한 구약 최후의 선지자였다. 그의 이름의 뜻이 '하나님의 은혜'와 연관된 것처럼 그는 구약의 율법 시대를 마감하고. 신약의 은혜 시대를 예비하는 준바자로서의 사역을 감당하였다. 세례 요한의 탄생 경위에 대한 자세한 설명은 누가복음 1장을 참조하라.
유대 광야에서(수 15:61;삿 1:16) - 여리고 남쪽과 사해 서쪽 고원 지대에 걸쳐 펼쳐진 황량한 석회암의 굴곡으로 되어 있는 광야이다. 군데군데 오아시스가 있고, 엔게디 근처에는 폭포도 있어 목초지로 이용되던 땅이었다(시 65:12;욜 2:22;눅 15:4). 이곳은 '십 황무지'(삼상 23:14, 15), '마온 황무지'(삼상 23:24), '엔게디 횡무지'(삼상 24:1), '예루엘 광야'(대하 20:16) 등으로 다양하게 불리어졌는데, 그 모든 땅이 유다 지파에 속하였기 때문에 전통에 따라 '유대 광야'로 지칭되었던 것이다. 한편, 이 광야에는 소수의 사람들이 칩거(蟄居) 생활을 하며 흩어져 살았는데 예수 당시의 극단적 유대교 종파의 하나인 엣세네파(the Essenes)도 그 중에 하나였다. 세례 요한의 성장지와(눅 1:80) 초기 사역지(요 3:23)가 바로 이곳이었기 때문에 그를 엣세네파의 일원으로 오해하는 경우도 있다. 한편 유대인들의 역사성으로 볼 때 '광야'(Desert, NIV)는 단순히 소외된 지역으로만 여겨지지 않고 '예언적 의미'를 갖고 있는 특수 지역이었다. 그 예로써 율법이 광야에서 계시되었고 열심당원들(Zealots)도 광야를 은신처로 삼았었다(24:26;행21:38). 이러한 의미에서 학자들은 세례요한의 활동 무대였던 광야가 신학적으로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고 주장하고 있다(Bonnard, Maier). 더불어 '광야에서'란 말 중에 '에서'에 해당하는 헬라어 '파라기네타이'(* )가 3인칭 단수 현재형으로 '그가...에 와서라는 의미를 지닌다. 즉 이는 단순히 장소를 강조한 말이 아니라 그의 사역의 현재성을 강조한 말이다. 따라서 이것은 바로 세례 요한의 사역의 현재성과 역사성을 생동감있게 전해주며, 그의 사역의 예언적 특성을 더욱 강조해주고 있다.
전파하여 - 이에 대한 헬라어 '케륏손'(* )은 '유앙겔리조마이'(* )와는 달리 말씀을 선포하는 그 자체로서의 사건에 관계된 것이 아니라 선포의 방법과 의미에 관계된 것이다. 즉 그는 메시지를 선포하되 단지 하나님께서 전파하라고 명령하신 말씀만을 고(告)하는 것이 그의 사명의 전부이었음을 뜻하는 단어이다. 따라서 그가 광야를 사역 장소로 택한 것도 하나님의 지시(사 40:3)에 따른 것이었다. 실로 세례 요한의 전파지로 택하신 광야야말로 이스라엘의 피폐(疲弊)한 영적 상태를 적절히 묘사했다 할 것이다.


=====3:2
회개하라 - 이 말의 원어 '메타노에이테'(* )는 고전 헬라어에서 순수한 의미로는 '마음을 바꾼다'는 뜻을 가지며, 통속적으로는 단순히 '무슨 일을 후회한다'라고 해석되고 있다. 그러나 신약성경에 도입된 이단어의 용례(用例)는 '새 행실로 돌아 온다'는 히브리어 '슈브'(* )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서 백성들로 여호와와 맺은 언약에로 돌아오라는 예언자의 외침이다. 즉 유대인 중에도 믿음없는 자가 있고, 우상 숭배자가 있기에 그러한 불신과 영적 음행(淫行)에서 돌이키라는 구약적 의미인 것이다(Alford). 실로 이 말은 머리로서만 계획을 수정하고 감정적으로만 후회하는 정도가 아니라, 죄와 죄책으로부터 완전히 돌아서는(Turn ye) 전인격적인 참회(懺悔)인 동시에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메시야를 영접하는 마음과 행위의 철두 철미한 변화 전반을 가리킨다. 물론 여기에는 인간의 행위가 근본적으로 올바른 궤도를 이탈해 있으며, 따라서 인간은 철저한 번화가 절대 요청되는 존재라는 것이 전제되어 있다(롬 3:10). 한편 이 같은 회개는 합당한 열매를 맺음으로서만 참 회개임이 증명된다.
천국이 가까왔느니라 - 요한의 설교의 두번째 주제로서 회개의 이유를 밝히고 있다. 왜냐하면 천국이 이 땅에 실현되는 날에는 그 나라를 유업으로 상속받기에 합당한 자와 그렇지 못한 자가 구별될 것이기 때문이다(25:31-46). 따라서 그 나라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하나님과의 올바른 관계성이 요구되는 것이다. 여기서 '천국' 또는 '하늘 나라'(* , 헤 바실레이아 톤우라논)는 마태복음에만 나오는 표현으로 마가와 누가에는 '하나님의 나라'(* , 헤 바실레이아 투 데우)로 표현한다. 한편 이 표현은 구약에 약속된 메시야 왕국에서 유래한 것으로서(단 2:44;7:13, 14,27) 구약 성경에서 하나님의 나라, 곧 '왕국'(* , 말쿠트)의 주요 의미는 '통치'(reign)이다. 이것은 신약 성경에서도 마찬가지이다. 즉 '왕국'을 뜻하는 '바실레이아'(* )는 간혹 영토를 뜻하는 경우도 있지만(4:8) 대부분이 역동적인 의미로서의 하나님의 '통치'를 암시한다. 이는 당시 천국을 영적인것으로만 해석하고 인간의 마음안에 있는 것로 간주하던 랍비들의 해석이나 메시야 왕국이 이뤄질 때 로마의 지배가 무너지고 정치적 평화와 번영이 도래하리라던 A.D. 1세기 당시의 유대인들의 극단적 해석과는 달리 역동적(dynamic)으로 이 땅에 실현되고 있는 하나님의 통치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이러한 사실은 구약에서는 대적들을 멸망시키고 이 땅에 공평과 정의로운 나라를 세우실(사 9:7) 하나님의 강림(降臨)과 통치에 대한 기대로 고조되어 (1) 다윗 언약 성취에 대한 대망으로 나타나기도 하며(삼하 7:13,14). (2) 여호와의 날로서 심판의 어두움(암 5:18,19)으로 이해되기도 하였다. 그리고 신약에서는 그리스도의 초림과 그의 십자가 사건으로 이 땅에 구체화될 천국과, 그리스도의 재림으로 완성될 영원한 천국이라는 이중적 구조를 지닌 것으로 이해되었다. 본문에 제시된 세례 요한의 선포는 바로 예수의 초림으로 구체화될 천국에 관한 언급인 것이다. 한편 여기서 '가깝다'(* ,엥기켄)라는 말은 천국이 갖는 역동적 의미와 함께 결합되어 '천국은 예수와 그의 말씀과 이적과 함께 왔고, 그의 죽음과 부활과 함께 왔으며, 이 시대의 종말에는 완성된 모습으로 올 것이다'라는 의미를 지닌다. 즉 하늘나라는 지금 그리스도와 함께 교회, 즉 온 세계에 왔고, 마침내는 영원히 존속될 것이다. 한편 마태가 '하나님 나라' 라는 표현을 피한 것은 하나님의 이름을 함부로 부르기를 꺼려했던(출 20:7) 유대인의

=====3:3
저는...자라(* ,후토스 가르 에스틴) - 본절의 내용은 2절에서 세례 요한이 천국을 전파하는 공적인 근거가 된다. 그런 측면에서 본 문장은 이유와 원인을 나타내는 '가르'(* )에 의미를 살려 '왜냐하면 저가...자이기 때문에'로 고는 것이 더욱 완전한 번역이 된다. 한편 본절은 예언과 성취라는 구조(flufillment formula)로 묘사되어지지 않은 구약 인용 구절 중의 하나이다. 즉 본문의 경우는 단순히 문자적 예언 성취가 아니라 하나의 모형적, 종말론적 성취로 보아야 한다.이러한 예언은 다른 복음서에도 공히 취급되고 있다(마 1:2, 3;눅 3:4-6;요 1:23). 특별히 세례 요한 자신은 요 1:23에서 '나는...광야에서 외는 자의 소리로라'하였고, 예수께서도 마 11:10에서 '이 사람에 대한 말씀이니라'하심으로써 이사야가 예언한 내용의 궁극적인 성취자가 바로 세례 요한임을 확증하고있다.
광야에 외치는 자의 소리 - 사 40:3은 바벧론 포로 생활에서 그의 백성을 예루살렘으로 돌아오게 하실 뿐만 아니라 더불어 귀환하실 여호와의 길을 예비하라는 예언이다(McNeile). 여기서 '외치는 자의 소리'는 하나님의 선구자를 가리킨다. 특별히 여기서 '소리'란 어떤 의지나 의미가 개입된 주체적 발언이 아니라 물리적 음파일 뿐이다. 이는 '로고스'(* ), 곧 말씀으로 표현된 예수의 주체적 발언과 그인격을 소개하는 세례 요한의 메신저(messenger)로서의 기능을 확실히 드러내 준다. 그리고'외치는 자'는 하나님이시요, 듣는 사람은 선지자 이사야를 일컫는 말이다. 그런데 포로에서 귀한하는 것에 대한 이 예언은 온전한 성취가 못되었고, 부분적으로 이루어졌을 뿐이다. 따라서 이 예언은 필연적으로 보다 온전한 성취, 즉 메시야 왕국(하늘나라)의 선포와 도래에 관심을 갖게 된다(Alford). 여기서 마태는 유대인들에게 단순히 역사적 측면에서의 포로 귀환이라는 차원을 뛰어넘어 영적으로 죄의 노예로 전락한 인류를 해방시키고 당신의 나라로 귀환시키기 위해 오실 그리스도 예수의 선구자로서의 세례 요한을 제시하고 있는 것이다.
주의 길을 예비하라(* , 해토이마사테) - '주'를 뜻하는'퀴리오스'(* )는 하나님에 대한 신적 칭호로서 히브리어로는 '주인'을 뜻하는 '아도나이'(* )에 해당한다. 이는 '여호와'의 이름을 함부로 불러서는 안된다는 십계명 중 제 3계명(출 20:7)의 금기(taboo)를 철저히 따른 것으로 여호와의 대(代)명칭이다. 한편 '예비하라'는 말은 정확하게 준비되었다는 뜻의 '헤토이모스'(* )에서 유래하여 불편함 없이 적절히 준비하라는 의미이다. 그런데 세례 요한은 주께서 이 땅에 셔서 사역하시는데 불편없도록 모든 것을 '예비하는' 선구자였다. 그리스도께서는 바로 이 예비된 길을 따라 오셔서 당신의 백성들을 위해 '천국'을 또한 '예비하셨다'(요 14:2, 3).
첩경(捷徑)을 평탄케 하하 - 여기서 '첩경'(* , 트리부스)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메실라'(* )는 곧게 뻗은 대로(high-way)를 가리킨다. 이에 대해 어떤 학자는 마차가 힘차게 달릴 수 있었던 '마차로'로 이해하기도 한다. 여하튼 이 길은 분명 '왕의 대로'로 손색이 없는 길임을 알 수 있다. 한편 이어지는 '평탄케하라'는 말의 헬라어 '유데이아스'(* )는 '곧다', '기쁘다', '바르다'는 뜻을 가진다. 이것은 '주의 길'을 회개로 표현한 은유법이다. 즉, 평탄케 하라'는 말은 단순히 물리적 측면에서 길을 곧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기쁘신' 뜻에 일치하도록 '바른'질서를 유지하며, 정의를 이루라는 말이다. 이말이 당시 세례 요한의 역할이었다면, 지금은 모든 성도들이 이 땅에서 감당해야 할 사명인 것이다.


=====3:4
약대 털옷 - 검소하고 금욕적인 구도자(求道者) 본연의 모습올 상징한 옷차림으로서 엘리야의 의상과 의도적 일치를 이룬다(왕하 1:8). 이는 결국 요한이 엘리야 재현 예언(말 4:5;눅 1:7)의 성취자임을 암시하는 것이다. 실로 투박한 털옷은 선지자들이 주로 입는 옷으로 알려졌으며(슥 13:4). 백성들의 죄를 책망하기 위해 하나님께로부터 보내심을 받은 선지자들이 백성의 죄를 자신이 대신하여 슬퍼하는 감정을 표현하기 위해 입었다 한다. 이 옷은 약대(낙타)의 가죽 옷이 아니라 단지 낙타 털로 거칠게 짠 옷이었다. 한편, 약대 털옷을 입은 세례 요한의 모습은 당시의 죄악된 현실을 부정하며, 회개를 선포하는 그의 사역과 일치한다.
가죽띠 - 풍성한 겉옷올 허리에 단단히 묶기위한 것으로 가난한 사람들의 옷차림에서 흔히 찾아볼 수 있었다.

메뚜기(* , 아크리데스) - 이는 몸집이 큰' 종류의 메뚜기로서 레위기에서도 식용(食用)으로 허락된 정결한 식물이었다(렘 11:22). 지금도 동앙에서는 메뚜기를 식용으로 삼는데, 유대에서는 하층 천민들이 음식으로 사용했다.
석청(* ,메리 아그리온) - 석청(石淸)은 야생꿀로서 나무의 수액(樹液)이라는 견해(Meyer, Burce, Diodorus)도 있고, 야생 벌꿀(Bengel, Carr)이라는 견해도 있다. 이것은 아직까지도 의문으로 남아 있으나, 구약 셩경에서 이 단어가 자주 나타나는 것으로 보아 바위 틈새에 만들어진 야생 벌꿀(삿 14:8, 9;삼상 14:25-29;시 81:16)로 생각된다. 메뚜기와 석청은 광야 생활을 하는 가난한 사람들을 연상시키고, 철저한 자기 절제와 고독한 삶을 살았던 예언자들의 경건한 행위를 암시해 준다. 실로 세례 요한은 의복과 음식으로 백성들에게 회개와 임박한 천국을 전했던 것이다(Bengel).

=====3:5
이 때에...다 그에게 나아와 - '이 때에'는 세례자가 '회개'와 '천국' 선포 사역을 시작한 때(1절)를 가리킨다. 실로 400년 동안 '여호와의 말씀을 듣지 못한 영적 기갈'의 암울한 시대의 절망 속에 살아가던 백성들은 세례 요한이야말로 그들의 영적 가뭄을올 해갈(解渴)시켜줄 단비로 여겼으며 그중에서도 어떤 이는 그를 예언된 메시야로 기대하며(눅 3:15;요 1:20) 그에게 모여 들었을 것이다. 그런데 여기나오는 지명(地名)들은 2:3과 마찬가지로 장소를 의인화시킨 것으로 성도(聖都) 예루살렘이 회개자로서 제일 먼저 광야로 향한 점에 유의해야 한다. 그긔고 '온 유대'에서 '온'이라는 말은 그 당시 백성들의 열화와 같은 환대(歡待)를 암시한다. 그리고 '요단 강 사방'은 요단강을 중심으로 한 갈릴리, 이두매, 베레아, 사마리아등의 이른바 종교적으로 소외된 지역 전반을 가리키며, 또 요한 사역의 본거지가 요단강인 것과 사역의 내용이 '회개 촉구'와 '세례 베푸는 일'이었음을 암시한다.


=====3:6
자기들의 죄를 자복하고 - 이는 자기들이 범한 죄를 조목조목 고백했음을 가리킨다. 이에 대해 역사가 요세푸스이(Josephus)는 '그들이 자신들의 범죄와 율법에 대한 죄를 고하였다'고 증언한 바 있다. 죄의 고백은 율법에 규정된 의무로서 범죄한 당사자의 책임(레 5:5;26:40)이자 제사장의 의무 중 하나였다(레 16:21). 이스라엘이 영적 분위기가 고조되었을 때는 이러한 고백이 순조롭게 이뤄졌으나(느 9:2, 3;시 32:5) 영적 기갈 상태에서는 침묵하고 있을뿐이었다. 한편 막 1:4과 눅 3:3에는 '죄 사함을 받게 하는 회개의 세례를 전파했다'한다. 그러나 마태는 세례의 선행 조건으로 '죄의 고백'을 언급했을 뿐 '죄 사함'은 예수가 죽을 때(26:28)까지는 언급하지 않고 있다. 이것은 요한의 세례는 '죄 사함의 세례요, 그리스도와 한 몸이 되는 증거가 된다는 사실을 강조하기 위해서였을 것이다. 아무튼 이제까지 이스라엘 역사상 개인적인 '죄의 자복'이 이처럼 전국적으로 확산된 적이 없었다. 바야흐로 메시야 도래의 기운이 전국적으로 고조되고 있는 것이다.
요단강(* ) - 히브리어 '야라드'(* , 내려가다)에서 파생된 이름으로 '빨리 흐르는 강'을 의미한다. 이 강은 헤르몬산에서 발원하여 갈릴리 바다를 경유(經由)한 다음 사해에 달하는 강이다. 요단의 수원(水源)에서 사해까지의 직선 거리는 약 217km인데, 전장(全長)은 강의 굴곡과 경사 때문에 400km 이상이 된다. 요단은 팔레스틴 최대의 강이며, 이스라엘 산업의 젓줄이 되는 중요한 강이다. 따라서 이스라엘 역사와도 필연적인 깊은 관계를 갖게 되는 바, 아브라함과 롯의 분가(창 13:10)로부터 야곱의 밧단아람 피신(창 32:10), 여호수아의 가나안 입성(신 3:26-29), 사사시대에는 에홋(삿 3:26-30), 기드온(삿 7:24,25), 입다(삿 12:5,6)의 전장(戰場)으로, 엘리야의 승천(왕하 2:6-11), 엘리사의 나아만치유(왕하 5:1-14) 등으로 유명하다. 그러므로 바로 이곳에서 세례 요한이 사역을 시작한것은 의미 심장한 일이라 하겠다. 한편 요단강은 물살이 매우 빠르기 때문에 세례 요한은 그 중한 여울에 자리잡고 주님의 길을 예비하였을 것이다.
세례를 받더니(* , 카이 에밥티존토) - 할례(circumcision) 아브라함 이전에도 있었지만 그 전에는 여호와 하나님과의 계약 의미가 부여되지 않았던 것처럼, 당시 세례 행위는 드문 일이 아니었지만 세례에 죄에 대한 고백과 씻음 그리고 그리스도와의 연합(union)이라는 상징적 의미가 부가된 것은 요한에게서 유래한다. 이에 대해 요세푸스(Josephus)는 증언하기를 세례자 요한이 세례가 하나님께 합당한 것이 되기 위한 필수적인 예비 행위로서 의로운 행위, 곧 죄 고백을 요구했다고 한다. 따라서 요한이 회개하고 세례받음으로써 메시야의 오심을 준비하자고 강력히 촉구한 점으로 보아 적어도 공개적으로 죄와 인연을 끊는 것이 세례의 전제 조건이었다고 추측할 수 있다. 한편 또한 쿰란(Qumran) 종파는 제의적 부정(祭衣的 不淨)을 제거키 위해 정결례(淨潔禮)를 행했다고 한다. 또한 당시 랍비들은 유대인이 아닌 한도내에서 개종자에게 세례를 베풀었다고 한다. 여하튼 요한의 세례가 온몸을 물에 잠기게 하는 침례(浸禮)를 행하였다는 것이 일반적인 견해이나 세례 의식이 침수(浸水)인지 아닌지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 의식이 상징하는 '회개와 사죄', 그로말미암아 얻어지는 '새 생명'이 중요한 것이다. 요한은 계시 수준의 세례를 베풀었고, 예수께서는 완성된 사역의 서례를 베푸셨다(26:28). 그러므로 요한의 세례는 주님의 길을 예비하였고 유대 민족을 새 생명의 길로 불러내고 있었다(Roberts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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