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참 아름다워라
주님의 세계는
저 솔로몬의 옷보다
더 고운 백합화
주 찬송하는 듯
저 맑은 새소리
내 아버지의 지으신
그 솜씨 깊도다
2. 참 아름다워라
주님의 세계는
저 아침 해와 저녁놀
밤하늘 빛난 별
망망한 바다와
늘 푸른 봉우리
다 주 하나님 영광을
잘 드러내도다
3. 참 아름다워라
주님의 세계는
저 산에 부는 바람과
잔잔한 시냇물
그 소리 가운데
주 음성 들리니
주 하나님의 큰 뜻을
내 알듯하도다
아멘
1. This is my Father's world,
And to my list'ning ears,
All nature sings, and round me rings
The mu sic of the spheres.
This is my Father's world:
I rest me in the thought
Of rocks and trees, of skies and seas;
His hand the wonders wrought.
2. This is my Father's world,
The birds their carols raise,
The morning light, the lily white,
Declare their Maker's praise.
This is my Father's world:
He shines in all that's fair
In the rustling grass I hear him pass,
He speaks to me everywhere.
3. This is my Father's world,
O let me never forget
That though the wrong seems oft so strong,
God is the Ruler yet,
This is my Father's world:
The battle is not done
Jesus who died shall be satisfied,
And earth and heaven be one. Amen.
마태복음5:1-2
[현대인의성경]
1. 예수님은 많은 사람들이 모여드는 것을 보시고 산에 올라가 앉으셨다. 그러자 제자들이 그분에게 나아왔다.
2. 그래서 예수님은 그들에게 이렇게 가르치셨다.
[NASB]
1. When Jesus saw the crowds, He went up on the mountain; and after He sat down, His disciples came to Him.
2. He opened His mouth and began to teach them, saying,
11월 20일 (월) / 모리타니 (2023 WWL 20위)프랑스 식민 통치의 잔재로 인해 오로지 로마 가톨릭 교회 만이 합법성을 갖고 공공건물을 유지하는 것이 허용됩니다. 그러나 누악쇼트 교구에서 가톨릭 교회는 복음주의자들이 주요 교회 구내에서 예배드릴 공간을 사용할 수 있도록 허용합니다. 개종은 엄격하게 금지되기 때문에 이주민 교회들은 이슬람교에서 기독교로 개종한 사람을 이들 공동체로 통합하는 것은 고사하고 교회 건물로 무슬림을 초대하는 것이 허용되지 않습니다. 모리타니 교회 를 위해 기도해주세요.
인도: 롬 5:3-5 말씀대로 살아가는 기독교인들이 되도록
서언 (마태복음 5:1, 2)
여기에는 이 설교의 일반적인 개요가 기록되어 있다.
Ⅰ. "설교자"는 설교자들의 왕이시오, 그의 교회의 위대한 예언자이신 우리 주 예수님이셨으니, 그는 "세상의 빛"으로 세상에 오셨다. 예언자들과 세례 요한은 "능력 있게" 설교를 하였으나, 그리스도는 "이들을 훨씬 능가하였다." 그는 영원하신 지혜자로서 "모든 창조물보다 먼저 아버지의 품속에 계셨으며," 그의 뜻을 완전히 아셨다(요 1:18). 우리는 앞 장 바로 끝 부분에서 볼 수 있었던 그리스도의 기적적인 병 고치심은 이 산상 설교를 위해 준비한 것이며, 또한 모든 사람들로 하여금 이러한 신적 능력과 선을 행하신 자로부터 가르침을 받도록 하게 하기 위함이었다. 아마도 이 설교는 그가 갈릴리에서 두루 말씀하셨던 설교들을 요약하거나 열거한 것인 듯 하다. 그의 설교 본문은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느니라"였다. 이 설교는 그 본문의 전반부로서 판단과 실천에서 "회개하거나 개혁하는 것"이 무엇인가를 보여 준다. 그는 여기에서 "우리가 어떻게 하여야 돌아가리이까?"(말 3:7)라는 질문에 답하여, "어떻게 할것"인가를 말하고 있다. 그는 이 본문의 후반부에 대하여 설교하였는데, 그때에 그는 여러 가지 비유를 들어 천국이 무엇과 같은가를(13:)보여 주었다.
Ⅱ. 이 산상 설교를 하신 "장소"는 갈릴리에 있는 산이었다. 언제나 그러했듯이 우리 주 예수님은 잘 갖추어진 곳에서 설교하시지 못하였다. 즉 그에게는 설교하기에 편리한 장소가 없었으며, 더욱이 "그의 머리를 둘 곳도 없으셨다."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은 모세의 자리에 앉아 온갖 지위와 명예, 안락을 누렸지만 그들은 율법을 그릇되게 와전시켰다. 그러나 진리의 위대한 스승이신 우리 주님은 광야에로 내몰아졌으며, "산"보다 더 좋은 강단을 찾을 수 없었다. 이 산은 "거룩한 산"이나 "시온 산"들 중의 하나가 아니라 평범한 산이었다. 이러한 산에서 설교하신 것은 구약의 율법 시대에서와 같이 어떤 장소만이 특별히 거룩하지는 않으며, 만일 그것이 적절하고 편리한 곳이라면 "어디서나" 기도하고 전파해야만 한다는 것이 "하나님의 뜻"임을 보여 주시기 위한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율법을 해석하셨던 이 설교를 산에서 하신 것은 율법이 "산"에서 주어졌기 때문이었다. 또한 이것은 기독교 율법의 엄숙한 선포이기도 하였다. 그러나 그 차이는 있다. 즉 "율법이 주어졌을 때" 주님은 "산"위에 "내려 오셨으나," 지금은 "올라 가셨다." 그 때에는 "천둥과 번개로" 말씀하셨으나 지금은 고요하고 조용한 소리로 말씀하셨다. 그 때에는 사람들이 멀리 떨어져 있으라는 명령을 받았지만, 지금은 가까이 오도록 초청을 받고 있다. 아, 이 얼마나 축복스러운 변화인가! 만일 하나님의 은혜와 선하심이 확실히 그의 영광이라면 복음의 영광은 모든 것을 능가하는 영광이다. 왜냐하면 "은혜와 진리는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왔기" 때문이다(고후 3:7; 히 12:16 등). "그들이 열국 백성을 불러 산에 이르게 한다"는 것이 갈릴리의 두 지파인 스볼론과 잇사갈에 대해 예언되었으며, 또한 우리는 이 "산에서" 의로운 제사를 드리는 법을 배우도록 부름을 받은 것이다. 그런데 이 산은 "여호와의 산"이었고 여기에서 그는 우리에게 "그의 길을 가르치셨다."
Ⅲ. "청중"은 그에게 나아왔던 제자들이었다. 마가복음 31장 3절 누가복음 6장 1절에 보면 그의 부르심을 받고 나아온 제자들이었다.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신 것은 그들이 병만을 고치려고 그를 따랐던 사람들과는 달리 사랑하는 마음과 배우려는 열의를 가지고 그를 따랐기 때문이었다. 또한 그가 그들에게 말씀하신 것은 그들이 기꺼이 가르침을 받으려고 했고(그는 온유한 자에게 그의 길을 가르친 것이다), 또한 그가 가르치신 것(이것은 사람들에게는 어리석은 것이었다)을 알려고 했고 또한 이것을 다른 사람들에게 "가르쳤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들은 이 일들에 대해 분명하고 확실한 지식을 가져야만 했다. 이 설교에 기술된 의무들은 천국의 은전(恩典)을 받으려는 희망을 가지고 "그곳에 들어가려고 하는" 모든 사람들에 의해 성실히 수행되었다. 그러나 비록 이 설교가 제자들에게 행해진 것이라 할지라도 역시 "많은 무리들"도 청종하였다. 왜냐하면 "무리들이 그 가르치심에 놀랐다"고 기록되었기 때문이다. "시내 산에서와 같이"(출 19:12) 백성들을 멀리 떨어지게 했던 일은 이 "산"에서 있지 않았다. 왜냐하면 그리스도를 통하여 우리는 하나님께로 나아가 그에게 말씀드릴 수 있을 뿐만 아니라 그에게서 들을 수 있기 때문이다. 아니 그가 이 설교를 말씀하신 것은 "무리들"을 목표로 삼았다. 그가 기적들을 행하신다는 소문을 듣고 많은 무리들이 그에게로 모여들었을 때 그는 그렇게 많은 무리들에게 가르칠 절호의 기회를 가질 수 있었던 것이다. 여기에서 유의할 것은 많은 물고기가 있는 곳에 얼마를 잡을 수 있으리라는 기대를 가지고 복음의 그물을 던지는 것은 신실한 교역자들에게 좋은 격려가 된다. "무리들"의 광경은 설교자로 하여금 생기를 북돋아 주는데 이것은 그 자신이 칭찬을 얻으려는 생각에서가 아니라 그들에게 유익을 주려는 진심에서 비롯된 것이라야 한다.
Ⅳ. 그의 설교의 "엄숙성"은 "낮으시니"란 말에 암시되어 있다. 그리스도는 종종 이야기체로 많이 말씀하셨다. 그러나 이 설교는 고정된 설교였다(kaqi,santoj auvtou/, 그가 앉으시니). 그는 청중들이 가장 잘 들을 수 있도록 자세를 취하였다. 그는 심판자가 입법자처럼 앉으셨다. 이것은 진지하고 침착한 마음으로 하나님의 일이 언급되고 청종되어야 한다는 사실을 암시한다. 그가 "앉으신"것은 "성경 말씀이 성취되려고 하기 위함이며"(말 3:3), "그는 연단사(금이나 은 등을 연단하여 깨끗케 하는 자)처럼 앉아서 "찌꺼기, 즉 레위의 후손들의 부패한 교훈들을 정결케 하실 것이다. "그는 보좌에 앉으사 의롭게 심판하셨다"(시 9:4). 왜냐하면 "그가 말씀하셨던 말씀이 우리를 심판할 것이기" 때문이다.
"입을 열어"란 구절은 욥기 3장 1절에서와 같이 히브리적인 완곡어법(婉曲語法)에 지니지 않는다. 그러나 어떤 사람들은 이것은 이 설교의 엄숙성을 암시한다고 생각한다. 즉 모인 군중에 너무도 많았으므로 그는 목청을 돋우어 평상시보다 더 큰 소리로 말씀하셨다는 것이다. 그는 오랫동안 "그의 종들과 선지자들"을 통해 말씀하셨으며, "그들의 입을 여셨다"(겔 3:27; 24:27; 33:22). 그러나 이제 그는 그 자신이 직접 "입을 열어," 자유스럽게 "권세 있는 자와 같이" 말씀하셨다. 고대 교부들 중의 한 사람은 이것을 다음과 같이 해석하였다. 즉 그리스도는 "입을 여시지 않고"가르치신 경우가 허다하다. 다시 말하면 그의 거룩하고 모범이 되는 생활로 "가르치신 것이다." 아니, 그는 "도수장으로 끌려가는 어린양과 같이 그의 입을 열지 아니함으로써" 가르치셨으나 이제는 "그의 입을 열고 가르치심으로써" 성경이 말씀한 예언이 이루어졌던 것이다(잠 8:1, 2, 6). 지혜가 부르짖지 아니하느냐?─높은 곳의 꼭대기에서 부르짖지 아니하느냐? 또한 "그의 입술을 여는 것은 바른 일들이 될 것이다." 그는 약속을 따라서 그들을 가르치셨으니(사 54:13), "네 모든 자녀는 여호와의 교훈을 받을 것이다." 이 목적을 위하여 그는 "학자의 혀"와(사 50:4) "주 여호와의 신"을 가지셨다(사 61:1). "그가 그들에게 가르치신" 것은 그들이 마땅히 미워해야 할 악과 그들이 마땅히 거처해야 할 선이었다. 왜냐하면 기독교는 사색의 문제가 아니라 우리의 마음의 성향과 우리의 대화의 경향을 조절하기 위한 것이다. 복음의 때는 개혁(개심)의 때이다(히 9:10). 복음으로 우리는 개심 되어야 하며, 선하고 나아져야만 한다. "예수 그리스도안에 있는 진리"는 "경건함에 속한 진리"이다(딛 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