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월 29일 “세르베투스, 성부, 성자와 성령의 삼위일체를 ‘머리 셋 달린 케르베루스’로 표현”
오늘은 미카엘 세르베투스(Michael Servetus, Miguel Serveto Conesa, 1509 or 1511–1553)가 태어난 날입니다. 1509년 혹은 1511년 9월 29일, 세르베투스는 아라곤(현재의 스페인 지역)에서 출생했습니다. 삼위일체 교리를 부인하여 로마교와 개신교 양진영에서 정죄받은 그는 파리에서 청년 칼빈과 만나기로 했으나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생리학자와 지리학자, 의사로 활동하여 익명으로 글을 쓰던 세르베투스는 1553년에 비엔나 종교 재판소에서 사형선고를 받았으나 탈출하였고, 그의 형상이 대신 처형되었습니다. 세르베투스는 제네바에서 붙잡혀 화형을 당했습니다.
시정부는 세르베투스의 재판을 통해 칼빈에게 망신을 줄 수 있는 기회임을 눈치챘다……시정부는 스위스의 여러 도시와 유럽의 다른 나라에도 편지를 보내, 세르베투스를 어떻게 다룰 것인지 자문을 구한다며 재판을 지체했다. 거의 모든 편지가 같은 내용의 조언을 보내왔다. 즉 세르베투스는 끔찍한 이단으로 사형해야 한다는 것이었다……세르베투스의 죽음 이후 오랫동안 칼빈은 너무 엄격하고 정죄하기 좋아하고 관용이라고는 전혀 없으며 아주 폭력적인 사람으로 묘사돼 왔다. 칼빈은 엄청난 종교 박해자로 그려졌다. 그러나 이단을 징벌하는 문제에서, 칼빈은 16세기의 일반적인 정서를 그대로 반영했을 뿐이다. 오늘날의 관점으로 보면 야만인처럼 보일지 몰라도, 칼빈의 동시대인들은 여기에 전혀 과한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실제로 당시 다른 유럽 국가들과 비교해서 제네바는 이단에 대한 사형집행을 훨씬 적게 한 편이었다.[W. Robert Godfrey, John Calvin: Pilgrim and Pastor, 김석원 역, 『칼빈: 순례자와 목회자』 (서울: 부흥과개혁사, 2009), 184-85.]
세르베투스의 처형으로 인해 칼빈은 많은 비판을 받고 있습니다. 그러나 세르베투스에 대한 선고와 형집행은 칼빈이 아닌 제네바 시정부가 한 것이었음을 명확히 합시다. 또한 삼위일체 교리에 대한 부인이 최고형에 처해지던 시대에, 칼빈이 세르베투스에게 회개를 종용했고, 화형이 아닌 단두처형으로 바꾸어줄 것을 시정부에 호소했던 사실도 간과해서는 안되겠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개인의 양심의 자유가 힘으로 억압되었다는 사실은 슬픈 일임에 분명합니다. 세르베투스는 마지막까지 자신의 견해를 굽히지 않았고, 불길 속에서 하나님의 아들께 기도했습니다.
칼빈은 세르베투스와 서신을 왕래했었다. 여기서 칼빈은 세르베투스의 교만 외에는 달리 해석할 수 없는 완고함에 직면하였다. 이 서신 교환에서 세르베투스는 성부, 성자와 성령의 삼위일체를 ‘머리 셋 달린 케르베루스’로 표현했다. 외콜람파디우스와 부처 역시 세르베투스에 대해 칼빈과 유사한 견해를 지니고 있었다. 외콜람파디우스는 세르베투스가 열 달간 바젤의 자기 집에서 머물렀을 때, 그에 대해 평가할 수 있었다……외콜람파디우스는 세르베투스가 끔찍스런 견해들을 퍼뜨리는 격하고 완고한 성미의 사람이라고 여겼다……세르베투스는 스트라스부르크에서 더 나은 대우를 받으리라고 여겼다. 그러나 그의 책, 『삼위일체론의 오류』(1531)는 거센 저항을 받았다. 세르베투스는 부처가 공개강좌에서 그를 논박한 후, 스트라스부르크를 떠나야만 했다.[Willem van’s Spijker, Calvin: Biographie und Theologie, 박태현 역, 『칼빈의 생애와 신학』 (서울: 부흥과개혁사, 2009), 169-7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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