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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26년 10월 3일, 아시시의 프란체스코(Saint Francis of Assisi) 별세, "왜냐하면 줌으로써 우리가 받으며 용서함으로써 용서를 받으며 죽음으로써 우리가 영생을 얻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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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월 3일 “아시시의 프란체스코, 주여, 저를 당신의 평화로 도구로 삼으소서.” 


오늘은 아시시의 프란체스코(Saint Francis of Assisi)가 별세한 날입니다. 1226년 10월 3일, 프란체스코는 시편 142편 “내가 소리 내어 주님께 부르짖나이다.”(Voce mea ad Dominum)를 부른 후 숨을 거두었습니다. 부유한 집안에서 자라난 프란체스코는 전쟁 도중 사로잡혀 1년간의 감옥생활을 하였고, 이후 고향에 돌아와서는 중병으로 고생하였습니다. 영적 체험 이후 프란체스코는 자신의 소유를 전적으로 포기했습니다. 그가 세운 수도회의 핵심 가치는 청빈의 삶이었습니다. 프란체스코 수도회는 교황 인노켄티우스 3세의 인가를 받은 후 선교사역에 힘썼습니다.


프란체스코 수도회가 인가받는 과정이 수월하지는 않았습니다. 사제가 아닌 평신도들이 설교하는 것이 문제였습니다. 하지만 프란체스코보다 앞서 등장했던 발도를 따르던 무리들이 이단으로 정죄 받아 로마 가톨릭 교회에서 떨어져나간 것이 프란체스코를 따르던 이들에게는 결과적으로 유리하게 작용했습니다……발도파의 특징은 평신도가 설교하는 것, 자발적 청빈, 그리고 성경의 문자적 해석이었습니다. 그런데 1179년 제3차 라테란 공의회에서 평신도가 설교하는 것을 정죄하고 금하자 발도파가 교황청의 잘못을 비판하기 시작했습니다. 결국 1184년 발도가 파문당하고 1215년 제4차 라테란 공의회에서 발도파 교리가 이단으로 정죄되었는데, 발도파가 떨어져 나간 것은 로마 가톨릭 교회에도 큰 손실이었습니다. 이런 과정의 막바지 즈음에 프란체스코가 나타났기에 교황청으로서는 발도파 경우를 교훈 삼아 프란체스코를 따르던 무리들이 평신도로서 설교하는 문제를 까다롭게 문제 삼지 않았던 것입니다.[임원택, 『역사의 거울 앞에서』 (서울: UCN, 2012), 159.]


우리는 수도원 생활만을 이상적인 경건의 본으로 받지 않습니다. 역사를 통해 드러난 수도원주의의 폐단을 명확히 알고 있어야 하겠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작금의 한국교회는 프란체스코 수도원의 시작과 설립자의 정신에서 배울 부분이 많이 있습니다. 우리의 문제는 가진 것을 너무 힘써 쥐고 있다는 데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조용히 프란체스코의 기도문을 읽으며, 어디에서 어떻게 떨어졌는지 생각해봅시다. 기도한 대로 사는 소박한 삶. 그렇게 살고 죽게 하소서.


주여, 저를 당신의 평화로 도구로 삼으소서.
미움이 있는 곳에 나로 용서를, 상처가 있는 곳에 나로 용서를,
의심이 있는 곳에 나로 믿음을, 절망이 있는 곳에 나로 믿음을,
어둠이 있는 곳에 나로 광명을, 슬픔이 있는 곳에 나로 기쁨을 심게 하소서.
오, 거룩한 주여, 나로 하여금 위로받기보다는 위로하게 하시며
이해받기보다는 이해하게 하시며, 사랑받기보다는 사랑하게 하소서.
왜냐하면 줌으로써 우리가 받으며 용서함으로써 용서를 받으며
죽음으로써 우리가 영생을 얻기 때문입니다.[Tim Dowley·John H. Y. Briggs·Robert D. Linder·David F. Wright, ed., The History of Christianity, 송광택 역, 『교회사 핸드북』 (서울: 생명의말씀사, 1989), 26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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