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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0년 10월 5일, 문준경(文俊卿, 1891-1950) 순교, "새끼를 많이 깐 씨암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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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월 5일 “문준경, 나는 이제 가더라도 우리 교인들은 손대지 말고 잘 살펴서 살려 주시오.” 


오늘은 문준경(文俊卿, 1891-1950)이 별세한 날입니다. 1950년 10월 5일 새벽 2시, 문준경은 증도(曾島)에서 공산군에게 죽임을 당했습니다. 17세에 결혼한 그녀는 남편에게 버림받고 바느질로 생계를 꾸리던 중 한 여성도의 전도를 받았습니다. 문준경은 이성봉 목사의 설교를 듣고 감화를 받아, 예수님을 구주로 믿게 되었습니다. 그녀는 경성성서학원을 졸업한 후, 고향 주변의 열 한 개 섬을 순회하며 복음을 전했습니다. 문준경은 주민들의 집배원, 짐꾼이었으며, 기도로 병자들을 고쳤던 섬의사였습니다. 섬마을 사람들은 일 년에 아홉 켤레나 고무신을 바꿔 신을 만큼 돌밭 길을 오가며 복음을 위해 헌신했던 문준경을 자신들의 할머니와 모친으로 여겼습니다.


목포인민위원회에 끌려갔던 문 전도사는, 섬이 완전히 국군에 의해 수복이 된 후에 들어가라는 이성봉 목사의 권고를 뿌리치고 증도로 돌아왔다. 1950년 10월 4일 국군이 증도까지 들어온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악의에 찬 공산당원들은 교인과 양민들을 바닷가 모래사장으로 이끌어 내고는 한 사람씩 단도로 내리쳐 죽였다. 특히 그들은 문전도사를 새끼를 많이 깐 씨암탉이라며 몽둥이로 내리쳤으며, 문전도사는 “아버지여 내 영혼을 받으소서.”라는 마지막 말을 남기며 총탄에 쓰러지고 말았다. 1950년 10월 5일 새벽 2시, 문전도사의 나이 만 59세였다……그녀가 고향 섬에 설립한 중동리교회, 진리교회, 대초리교회 등 10여 개의 교회는, 오늘날 한국교회를 대표하는 수많은 목회 지도자들을 배출한 믿음의 산실로 많은 결실을 이루어 가고 있다.[박은배, 『하나님의 거처: 한국기독교 국내유적답사기 2』 (서울: 새로운사람들, 2009), 150.]


2006년 조사 결과에 따르면, 증도 주민 90%가 개신교 신자입니다. 한때는 상처 많고 한 많은 여인이었으나, 거듭난 후 복음의 전령사가 되어 섬마을에 복음의 씨앗을 뿌렸던 문준경 전도사의 영향력이 아직까지 남아 있는 것입니다. 신안군 섬마을 선교의 영원한 어머니로 불리는 문준경. 아름다운 단풍과 높은 하늘에 취하는 것도 나쁘지 않습니다. 하지만 이 좋은 날, 몽둥이에 맞고, 죽도에 찔리면서도 “하나님 아부지시여! 내 영혼을 받아 주시오!”라고 기도하며 죽어간 순교자를 기억하는 것은 어떨까요? 자신만의 행복과 안정에 매몰된 나를 돌아보면서 말입니다.


한번은 증동리에 장질부사가 돌았다……먹을 게 부족하고 위생시설이 형편없는 그 시절 많은 사람들을 죽음으로 몰아간 무서운 전염병이었다. 한 집에 환자가 한 명 생기면 가족 전체가 금방 전염되었다. 죽어 나가는 사람이 속출했다. 하지만 장례를 치를 수도 없었다. 장례를 치르려면 환자의 집에 들어가야 하고 시체를 만져야 하는데 전염될 위험이 있기 때문이다……온 동네에 냄새가 진동하면서 살벌한 죽음의 기운만이 서서히 퍼져 나갔다. 일본인 관리들도, 마을 주민들도 속수무책이었다. 이때 문준경 전도사가 나섰다. 환자의 집에 들어가 시체를 옮겨 날랐으며, 조촐하게 장례를 치러 주었고, 아직 살아 있는 사람들을 돌보고 치료했다……이러게 나서서 죽은 사람들을 치우고 병든 사람들을 치료하며 온 마을을 돌아다녔지만 문 전도사는 전혀 장질부사에 전염되지 않았다……사람들은 더욱더 문 전도사를 따르고 존경하게 되었다.[유승준, 『천국의 섬, 증도』 (서울: 홍성사, 2012), 176-7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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