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월 8일 “스크랜튼 부인, 우리는 한국적인 것에 긍지를 갖는 한국인이 되기를 희망한다.”
오늘은 메리 스크랜튼(Mary Fletcher Scranton, 1832-1909)이 별세한 날입니다. 1909년 10월 8일 새벽, 77세의 스크랜튼 부인은 숨을 거두었습니다. 그녀는 양화진외국인선교사묘원에 안장되었습니다. 매사추세츠 주 벨쳐타운에서 감리교 목사의 딸로 태어나 1872년에 남편과 사별한 스크랜튼 부인은 외아들 윌리엄이 1884년 10월에 조선파견 선교사로 임명되자, 자신도 선교를 결심하게 됩니다. 미국감리교 해외여선교회의 파송을 받은 그녀는 아들과 함께 함께 1885년 6월에 내한했습니다. 어려운 환경 속에서 스크랜튼 부인은 학생 한 명으로 학교를 시작했습니다.
건물이 완성되어 갈 때쯤 스크랜튼 선생은 희망에 차 있었다. 집이 완성되면 지원자가 많이 올 것이라고 생각한 것이다. 그러나 여전히 학생을 구하기란 쉽지 않았다. 여성들은 밤에만 외출이 허락되었기 때문에 학생 모집에 제한이 있었다. 그래서 스크랜튼 선생은 거리에서 고아를 찾거나 가난한 집을 찾아다니며 딸을 무료로 교육시켜 주겠다고 부모를 설득하여 학생들을 모집하려 했다. 그러나 이 또한 부모들이 서양인에게 딸을 맡기면 다시는 못 보게 될까 봐 두려워서 학교에 보내려 하지 않아 제대로 이루어지지 못했다. 이와 같이 서양인들에 대한 잘못된 이해가 초기 학생 모집을 방해하는 가장 큰 장애였다. 서양인들에 대한 의심과 편견이 퍼지면서 아무도 딸을 학교에 보내지 않을 뿐 아니라 학교에 보내려는 사람들까지 방해를 하고 비난을 하였다. 여기에 더하여 콜레라까지 만연하자 부득이 학교 문을 닫아야 하는 상황까지 발생하였다.[이배용, 『스크랜튼: 한국 근대 여성 교육의 등불을 밝히다』 (서울: 이화여자대학교출판부, 2008), 49.]
내한 당시 스크랜튼 부인은 52세였습니다. 적지 않은 나이에 믿음의 모험을 한다는 것은 쉽지 않은 일입니다. 그녀는 1901년 병으로 귀국했으나 다시 조선으로 건너와 전도 사업에 힘썼습니다. 스크랜튼 부인의 지도를 받은 전도부인들은 수천 가정을 심방하며 복음을 전했습니다. 한국최초의 여성병원과 근대식 여학교를 논할 때마다 그녀의 이름도 기억되고 있습니다. 인생의 후반전을 선교지에 드린 스크랜튼 부인의 모범이 아름답습니다. 사명을 위해 모험을 감당해야 할 때, 어떻게 반응하시겠습니까? 나이와 형편을 뒤로 합시다. ‘네’와 ‘아멘’으로 순종하십시다.
1886년 2월부터 학교 건축공사를 시작했으나 선교부로부터 추가예산이 책정되지 않았다는 소식을 듣고 스크랜튼 부인은 미국의 친구들과 각지에 원조를 요청했다. 그 결과 미국 일리노이 주 오크파크에 사는 블랙스톤 부인이 3,000달러를 보내주었고, 선교부 뉴욕지부에서는 700달러의 기부금을 보내주었다. 이를 바탕으로 1886년 11월 소망하던 교사(校舍)의 완공을 보게 되어……건평 약 200평 규모로 35명 정도의 학생을 수용할 수 있는 교실과 숙소를 갖춘 큰 한식 기와집이었다……이화학당은 이렇게 탄생했다……“우리의 목표는 한국 소녀들로 하여금 우리 외국 사람들의 생활, 의복, 환경에 맞도록 변화시키는 데 있지 않다. 우리는 한국인을 보다 나은 한국인으로 만드는 데 만족한다. 우리는 한국적인 것에 긍지를 갖는 한국인이 되기를 희망한다. 나아가서 그리스도의 교훈을 통하여 완전무결한 한국인을 만들고자 희망하는 바이다.”[양현혜, 『빛과 소망의 숨결을 찾아』 (서울: 이화여자대학교출판부, 2007), 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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