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월 10일 “야코부스 아르미니우스. 가능케 하는 은총, 결정적인 은총”
오늘은 야코부스 아르미니우스(Jacobus Arminius)가 태어난 날입니다. 1560년 10월 10일, 아르미니우스는 네덜란드 남부에 있는 아우데바터르(Oudewater)에서 출생했습니다. 스페인 군인들에 의해 가족을 잃은 그는 라이덴대학과 제네바대학, 그리고 바젤대학에서 수학했습니다. 아르미니우스는 1588년에 목사안수를 받고 암스테르담에서 목회하던 중 예정론에 대해 베자와 다른 견해를 갖게 되었습니다. 1603년에 라이덴 대학교 교수가 된 그는 동료 교수였던 고마루스(Francis Gomarus)와 논쟁을 벌였습니다. 아르미니우스가 죽은 후(1609년) 그의 가르침을 따르던 이들(항론파, Remonstrants)은 도르트회의에서 정죄되었습니다.
중생한 그리스도인일지라도, “하나님의 선행(先行)하여 일으키시는 계속된 협력적 은혜가 없이는 전혀 어떤 선(善)을 생각하거나 품거나 행할 수 없고, 어떤 유혹에 저항할 수 없다”라고 그는 계속 진술하고 있다. 알미니우스는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우리의 전적 의존을 강조하는 점에 대해 조심성을 표명했다. 그러나, 그는 한 가지 핵심적인 문제에서 어거스틴과 입장을 달리했다.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에 의존되어 있지만, 그 은혜란 그것에 대한 사람의 수납 여부의 결정에 따라 주어진다. 하나님의 은총은 우리의 구원을 「가능하게」할 뿐이지, 「결정적이게」하지는 못한다. 이리하여 구원에 관한 궁극적 선택이란 사람 자신에 의한 것으로 귀결되었다.[Tony Lane, Christian Thought, 김응국 역, 『복음주의 입장에서 본 기독교 사상사』 (서울: 나침반, 1987), 297.]
아르미니우스는 역병을 두려워 하지 않고 양들을 돌보았던 목회자였습니다. 그는 하나님께서 선물로 주시는 은혜와 그 은혜의 필요성에 대해 믿었습니다. 문제는 하나님의 전적 예지에 대한 반대에 있었습니다. 아르미니우스가 열어놓은 문은 그의 지지자들에 의해 활짝 열려지고 말았고, 구원에 대한 결정권은 점점 사람들의 손에 놓여지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그의 후계자들로 인해 열린 도르트 회의의 결정을 믿음으로 받고 존중합니다. 하나님만이 죄인을 구원하십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르미니우스의 가르침을 따르는 이들 중에도 우리의 형제들이 있음을 잊지 맙시다. 믿음의 도리를 견고히 하되, 싸움꾼이 되지 않게 하소서.
아르미니우스는……신자들이 은혜에 저항하고 신앙의 길을 버릴 수……있다는 관점을 표명했다. 그는 참된 그리스도인도 유혹에 굴복하고 신앙을 버리며 구원을 빼앗길 수 있다고 주장했다. 아르미니우스는 모든 택한 백성이 궁극적으로 구원받을 것이라고 했다. 그러나 그 택한 백성이란 믿고 끝까지 견딜 것을 하나님이 미리 아신 이들이다. 그는 하나님을 신뢰하기를 그만두는 그리스도인은 더 이상 신자가 아니며, 참지 못하는 이들은 끝까지 인내하지 못한다고 논했다. 따라서 믿고 견디기를 그만둔 이들은 택한 백성이 아니며 최종적인 멸망에 처해질 것이다. “거듭난 이들도 때때로 성령의 은혜를 상실하는 것이 분명하다. 왜냐하면 그들도 양심을 거스려 죄를 지을 때는 의지의 전적인 동의와 더불어 죄를 짓기 때문이다.”[Bruce Demarest, The Cross and salvation: The Doctrine of Salvation, 이용중 역, 『십자가와 구원』 (서울: 부흥과개혁사, 2006), 646-4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