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니페이스는……가까운 고문들을 고향 아냐니(Anagni)에 모으고 파문령을 선포할 준비에 들어갔다……윌리엄 노가레는……아냐니에 침입하여 교황을 납치하였으며, 이 때 교황의 가족과 친척들은 폭도들에 의해 강탈당했다……노가레는 보니페이스에게 양위를 강요했다. 그러나 노령의 교황은 이에 굴하지 않고 만일 자기를 죽이고 싶다면 “여기에 나의 목이, 여기에 나의 머리가 있다”고 대답하였다. 노가레는 그를 구타한 후 당나귀 위에 거꾸로 앉히고 온 동네를 돌게 하는 모욕을 가하였다. 아냐니에 있었던 추기경들 가운데 오직 두 사람, 스페인의 피터(Peter of Spain)와 니콜라스 보카시니(Nicholas Boccasini)만이 교황의 편을 들었다. 마침내 보카시니의 지도 아래 일부 촌민들이 교황을 구출하고, 프랑스인들과 그 부역자들을 그 도시로부터 축출하였다……보니페이스는 로마에서 더 이상 이전의 영향력과 권위를 행사할 수 없었다.[Justo L. Gonzalez, The Story of Christianity, 서영일 역, 『중세교회사』 (서울: 은성, 2007), 181-82.]
교황권을 세속권력 위에 두려는 보니페이스의 노력은 실패로 끝났습니다. 우리는 구원에 필요한 모든 교리가 교황의 권위 아래 있다는 주장에 동의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과 죄인 사이에 어떤 피조물도 있을 수 없습니다. 주께서 세우셔야 높아질 수 있습니다. 겸손한 데 마음을 둡시다.
1301년 프랑스의 주교가 필립에게 저항하자 반역의 죄와 신성 모독이라는 죄명으로 투옥해 버리고, 교황에게는 이런 일이 있었으니 양해해 달라는 정도의 편지를 보냈다. 자존심이 강한 보니페이스는……필립에 대한 지지를 거두고, ‘사제에게 주는 명령’을 재발표함으로 필립과 맞서게 된다. 그런데 이 시기는 또한 프랑스 정치 발전에 중요한 시작점을 제공한 삼부회가 만들어진 시기로……삼부회는 필립 4세가 영국과의 전쟁을 위한 군비 조달을 위해서 귀족들과 일반인들의 지원을 끌어내고자 하는 목적으로 형성된 것이지만 이것은 교회사적으로는 교회가 국가와의 관계를 끊고 세상적 관점에서 일을 처리하는 중요한 시금석이 되기 때문이다. 이렇게 모여진 삼부회에서 왕은 제상들은 교황이 이단자이며, 그 자리에서 내쫓아야 한다고 주장하였다.[최형걸, 『중세교회사』 (서울: 이레서원, 2000), 305-30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