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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89년 10월 15일, 우르바누스 6세(혹은 우르반 6세, Pope Urban VI, c. 1318–1389) 사망, "나폴리 출신 교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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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월 15일 “우르바누스 6세, 과유불급(過猶不及)”


오늘은 교황 우르바누스 6세(혹은 우르반 6세, Pope Urban VI, c. 1318–1389)가 숨을 거둔 날입니다. 1389년 10월 15일에 죽은 우르바누스 6세는 독살된 것으로 추정되고 있습니다. 1318년경에 나폴리에서 태어난 그의 본명은 바르톨로메오 프리냐노(Bartolomeo Prignano)였습니다. 그는 아체렌자(Acerenza)와 바리(Bari)에서 대주교로 있었고, 교황 선출 전에는 교황청에서 상서국장으로 일했습니다. 1378년 부활절에 교황의 관을 쓴 이탈리아인 교황 우르바누스 6세의 개혁 작업이 추기경들과의 마찰을 빚은 것은 당연한 일이었습니다. 당시 많은 추기경들은 사치스러운 생활을 일삼았고, 뇌물로 재산을 모으는 등 부도덕한 삶을 영위하고 있었습니다.


교황청의 아비뇽 유수는 1377년 1월 교황청 기구들의 로마 귀환이 마무리됨으로 끝이 났습니다. 거의 70년에 가까운 아비뇽 유수를 겪으며 교황청의 위세는 이전과 같이 않았습니다……교황청의 환도를 주도했던 교황 그레고리우스 11세가 환도가 끝난 이듬해인 1378년 3월에 사망하자 오랜만에 로마에서 봉쇄 교황 선거가 있었습니다. 로마 시민들은 프랑스 출신이 교황으로 선출될 경우 다시금 아비뇽으로 돌아가게 될까봐 우려했기에, 로마 출신이나 적어도 이탈리아 출신이 교황에 선출되기를 기대하고 있었습니다. 새로 교황으로 선출된 우르바누스 6세는 나폴리 출신으로 추기경단에 속하지 않은 사람으로서 교황에 선출된 마지막 교황이었습니다.[임원택, 『역사의 거울 앞에서』 (서울: UCN, 2012), 261-62.]


우르바누스 6세는 폭도들의 위협 속에 선출되었다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이탈리아와 로마의 권위를 회복시키려는 그의 개혁 작업은 지나치게 노골적이고 성급했고, 이는 화(禍)를 초래하고 말았습니다. 로마를 떠난 프랑스인 추기경들은 새로운 교황을 세웠고, 두 진영은 서로를 파문하고 공격했습니다. 로마와 아비뇽은 각자의 교황과 교황청을 세워 정당성을 주장했고, 이러한 분열은 약 40년간 계속된 것입니다. 교황에 대한 교리를 받아들이지 않는 개신교인들도 이 사건을 통해 배울 것이 분명히 있습니다. 옳은 대의를 추진해나갈 때, 지나치게 성급하거나 오만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신자이기 이전에 사람으로서 지켜야할 덕목이기도 합니다.


우르반 6세는 귀족적이고 교만했을 뿐 아니라 난폭한 성격의 소유자였다. 하루는 공식적으로 추기경단에 프랑스인의 숫자가 너무 많다고 불평하였다. 그는 또한 두 사람의 추기경을 가리켜 저능아요, 방탕아라고 모욕하기도 하였다. 그는 또한 공개회의 석상에서 또 다른 제3의 추기경에게 어리석은 수작을 집어치우라는 식으로 면박을 주기도 하였다. 따라서 무더운 여름이 닥쳐오자 추기경들이 하나씩 휴가를 신청한 것이 당연한 일이었다. 얼마 안 되어 우르반 6세의 측근에는……그의 선출 당시 다수를 점했던 프랑스 출신 추기경들이 자취를 감추었다. 다수의 추기경들은 스스로 아페닌 산맥 아래에 있던 아냐니에 모여 우르반 6세의 선출은 폭도들의 압력에 의해 이루어진 것은 무효라고 선언하고, 그 대신 프랑스인 제네바의 로버트를 선출하였다.[William R. Cannon, History of Christianity of the Middle Ages, 서영일 역, 『중세교회사』 (서울: 기독교문서선교회, 1986), 384-8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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