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월 25일 “주영진, 조금이라도 주기철의 아들로 행사하며 영광을 받아서는 안 된다.”
오늘은 주영진(朱寧震, 1919-1950)이 태어난 날입니다. 1919년 10월 25일, 주영진은 경남 창원군 웅천면에서 주기철과 안갑수의 장남으로 출생했습니다. 1933년, 14세의 주영진은 어머니를 잃고 맙니다. 33세의 안갑수가 종기 수술 후유증으로 별세했기 때문입니다. 그는 아버지의 일사각오(一死覺悟) 정신을 일찍이 습득했습니다. 주영진은 동방요배 거부로 창신 소학교에서 쫓겨난 후 오산학교에 진학했습니다. 교장 조만식의 가르침을 잘 받은 그는 신학을 공부하기 위해 일본으로 떠납니다. 평양신학교가 신사참배 거부로 폐교되었기 때문입니다. 동경 루터신학교에서도 학업은 편안히 진행되지 못했습니다. 신사참배를 강요받던 주영진은 4학년 때 자퇴할 수밖에 없었고, 일치신학교로 옮겼으나 학교는 그를 퇴학시켰습니다. 주기철 목사의 아들을 내쫓으라는 일본 경시청의 압력에 굴복하고 말았기 때문이었죠. 귀국한 주영진은 애린원 총무, 농장 노동꾼, 어장 관리인 등 닥치는 대로 일을 하여 끼니를 이었습니다. 평양으로 돌아간 그는 아버지의 순교 이후 산정현교회 전도사로 일하다가 어머니 오정모의 권고로 사역지를 장현리로 옮겼습니다. 조금이라도 주기철의 아들로 행사하며 영광을 받아서는 안 된다는 것이었습니다.
“주영진 전도사는 젊은 전도사였지만 참으로 휼륭했고 그의 신앙은 대쪽 같은 굳은 믿음이었고 한번 옳다고 생각하면 굽힐 줄 모르는 성격의 소유자였다.” 오산학교 재학 시절 시편을 통달하고 루터 신학교 재학 시절에는 로마서와 요한복음을 동급생들에게 강의할 만큼 성경 실력이 뛰어났다. 일본에서 신학수업을 해서 장로교회의 교리와 신조에는 “약간 부족한 점이 없지 아니했으나 주님을 향한 일편단심은 누구 못지않게 훌륭했다.”[박용규, 『평양 산정현교회』 (서울: 생명의말씀사, 2006), 346-47.]
주영진은 김일성 공산정권의 위험을 감지했지만 월남하지 않고 교회를 지켰습니다. 체포를 대비하여 항상 솜두루마기를 입고 다니며 순교의 각오를 다졌습니다. 1950년 5월, 31살의 젊은 주영진은 부흥회 인도 후 귀가하던 중 공산당원들에게 끌려갔습니다. 주님을 위한 고난으로 점철된 젊은이의 인생은 목적 없이 장수하는 악인의 삶과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아름답습니다. 그리스도인은 삶의 안락과 물질적 평안보다 명예를 소중히 여깁니다. 그는 그리스도의 것이기에 고난을 당할지언정 양심을 팔지는 않습니다. 취업과 스펙 쌓기에만 열중인 젊은이들과 달리 하나님의 뜻이라는 대의를 위해 자신을 드렸던 주영진이라는 청년을 생각하며 자신을 돌아봅니다.
공산정권은 신앙으로 바르게 살려고 하는 교회와 주전도사에게 주일선거라는 올가미를 씌웠다. 그러나 주전도사는 통렬히 비난하고 강력히 거부하였으며 일체 저희 종교정책에 호응치 않았다. 1946년 6월 평양보안서에 1차 검속되어 모진 고문을 받고 풀려나……6.25를 맞았다. 그는 신의주에서 부흥사경회를 인도하다가 산정현교회로 돌아와서 피신을 권고하는 주위의 설득을 물리치고 주님이 가신 길, 부친이 가신 길, 그 길을 따라 가리라는 각오를 결연히 하고 그 제단에서 기도하고 종을 쳤다. 교인들을 모여왔다. 주전도사는 ‘죽을 준비를 갖추라’고 외치다가 공산당에 체포되어 간 그 후로 그의 행방을……아는 이가 없다.[임영섭, 『한국 기독교 순교자(100인 전기)』 (서울: 양문, 1991), 299-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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