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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76년 11월 1일, 히스베르투스 푸치우스(Gisbertus Voetius, 1589–1676) 별세, "네덜란드 제2 종교개혁의 꽃을 피운 설교자요,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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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월 1일 “히스베르투스 푸치우스, 주께서는 독이나 상처로부터 가장 유익한 양분을 만드신다.”


오늘은 히스베르투스 푸치우스(Gisbertus Voetius, 1589–1676)가 별세한 날입니다. 1676년 11월 1일, 네덜란드의 개혁신학자 푸치우스는 눈을 감았습니다. 회스던(Heusden)에서 태어난 푸치우스는 레이든 대학에서 수학하면서 호마루스 등의 강의를 통해 개혁사상으로 무장하게 되었습니다. 그는 1617년에 고향에서 목회를 시작하여 17년간 계속하였고, 1634년부터 42년간 위트레흐트 대학에서 가르쳤습니다. 푸치우스는 『도르트 회의』에 가장 나이 어린 총대로 참석하여 활약하기도 하였습니다. 그는 선교사 파송에 영향력을 행사했고, 최초로 포괄적인 개신교 선교신학을 개진했습니다. 푸치우스는 네덜란드 제2 종교개혁의 꽃을 피운 설교자요, 교수였습니다.


뵈티우스의 영향력이 대학에 광범위하게 미쳐서 위트레흐트 대학은 자주 뵈티우스 아카데미라고 불리었다. 네덜란드와 유럽 전역……영국과 미주 학자들은 뵈티우스를 개혁주의의 학문적이고 체험적인 신학자라고 평가했다. 새로운 신학의 창시자는 아니지만, 그는 수천 명에게 영향을 미친 실력 있는 조직신학자였다. 더욱이 뵈티우스는 그의 발자취를 따르면서 스콜라주의와 경건 사이에 조화로운 일치를 유지하기를 추구했던 수백 명의 목회자들을 훈련하는 데 도구가 되었다. 뵈티우스의 가르침은……스코틀랜드 장로교도들과 영국 비국교도 학생들을 매료시켰다. 그의 많은 학생들에게……그의 이상은 (그의 소원하는 바와는 반대로) “뵈티우스적인 것” 혹은 “뵈티우스파”로 알려지게 되는 것으로 공식화되었다. 정통적인 교리와 살아 있는 경건을 강력하게 조합함으로써, 뵈티우스주의자들은……일반인들에게 도달하는 데 매우 성공적이었다.[Joel R. Beeke and Randall J. Pederson, Meet the Puritans, 이상웅‧이한상 역, 『청교도를 만나다』 (서울: 부흥과개혁사, 2010[2006]), 743. ‘뵈티우스’는 ‘푸치우스’를 가리킵니다.]


그는 레이든 대학 시절, 아르미니우스주의를 반대한 이유로 기숙사에서 쫓겨난 적이 있습니다. 푸치우스의 첫 사역은 로마교가 우세한 지역에서 어려움 속에 이루어졌는데, 그는 미조직교회였던 그곳을 잘 목양하여 장로와 집사를 세워 조직교회로 이끌었습니다. 또한 신앙을 이성으로 대체한 데카르트주의, 신비주의와 제도권 교회 이탈을 조장한 장 드 라바디 등을 비판하며 바른 길을 제시했습니다. 고립과 외로움을 진리수호를 위해 마땅히 치러야 할 대가로 여겼던 푸치우스는 영적 거인이자 본받아야 할 선배입니다. 이런 이들을 기억하는 것은 의무이자 특권입니다.


영적 침체의 궁극적인 목적은 택자들을 구원하시는 과정에서 하나님의 능력과 자비와 지혜를 드러내시기 위함이다. 연약한 자들을 구원으로 이끌어 가시는 경이로운 과정을 통해, 다시 말해 하나님께서 택자들의 절망까지도 사용하시는 신비한 방법을 가지고 그들을 지옥에서 천국으로 인도하시는 과정을 통해 하나님의 위대하심이 나타나는 것이다. 연인들 사이에서 나타나는 다툼이 더 깊은 사랑을 가져오듯이, 우리 주 하나님께서는 독이나 상처로부터 가장 유익한 양분을 만들어 내신다. 심지어 지옥의 고통 같은 처절한 아픔을 통해서도 가장 좋은 치료제를 만들어내시는 분이시다. 그러므로 영혼의 치료사 되시는 분께서 진흙을 눈에 발라 눈먼 자의 눈을 뜨게 하시며, 그의 의의 심연에는 자비가 있고 자비의 심연에는 의가 자리 잡고 있음을 드러내신다.[Gisbertus Voetius, Spiritual Depression, 황영식 역, 『영적 침체』(서울: 누가, 2011), 84-8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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