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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52년 11월 2일, 요한 알브레히트 벵엘(Johann Albrecht Bengel, 1687–1752) 별세, "나의 간절한 소망은 하늘로 향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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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월 2일 “요한 알브레히트 벵엘, 교회에서 일하는 사람들은 어미닭과 같다.”


오늘은 요한 알브레히트 벵엘(Johann Albrecht Bengel, 1687–1752)이 별세한 날입니다. 1752년 11월 2일, 뷔르템베르크(Wurttemberg)의 경건주의자이자 루터교 교역자 벵엘은 숨을 거두었습니다. 그는 뷔르템베르크의 빈넨덴(Winnenden)에서 출생하여 튀빙겐 대학교에서 수학했습니다. 최우등으로 석사과정을 마친 벵엘은 연구학자로서 6년의 시간을 보냅니다. 이후 연구여행 중 할레에서 프랑케와 경건주의 정신을 접하고 공동체 정신을 배웁니다. 그는 28년간 뎅켄도르프(Denkendorf) 기숙학교의 전담교사로 있었고, 1741년에 헤르브레히팅엔(Herbrechtingen) 교회의 감독과 후작의 자문위원으로 임명되었으며, 1749년에는 알피르스바흐(Alpirsbach)의 감독관으로 부임했습니다. 여러 사본을 첨부한 헬라어 신약성경을 출판했던 벵엘은 독일어로 신약성경을 번역하기도 했습니다. 당시는 여전히 마틴 루터가 번역한 성경이 보편적이던 때였습니다.


벵엘은 전 생애에 걸쳐 루터의 번역과 씨름하였다. 그는 1753년 초판이 발행된 신약성경 독일어판 서문에 다음과 같이 썼다. “나는 루터가 번역한 것보다 더 나은 것은 아니라 할지라도 차별된 번역본을 제공하기를 원합니다……그러나 (루터의 번역이) 아직까지는 유용하기에 먼저 감사하게 생각합니다. 그것과 함께 또 다른 번역본을 갖는다는 것은 좋은 일입니다. 이 번역본은 유창하지는 않지만 그리스어 원문에 기초하려고 힘들여 고심했습니다. 이 역본은 또 다른 역본에게 도움을 줄 것입니다. 이 두 권의 번역본을 가지면 한 가지 번역본의 부족을 다른 번역본을 통하여 도움을 받게 될 것입니다.” 벵엘은 겸손하게……우아한 면에서는 루터의 것에 떨어지지만 정확한 번역을 제공함으로써 두 개의 번역본이 서로를 보완하는 위치에 있다고 말하였다.[Carter Lindberg ed., The Pietist Theologians, 이은재 역, 『경건주의 신학과 신학자들』 (서울: 기독교문서선교회, 2009), 463.]


벵엘은 다양한 사본을 바탕으로 하여 성경을 비평적으로 연구한 최초의 학자 중 하나였으나 본문비평주의자는 아니었습니다. 위대한 헬라어 학자였던 그는 대학에서 이름을 내는 것보다 평범한 교육자의 길을 택했습니다. 경건주의를 생각할 때 내면의 음성에만 주의를 기울이는 주관주의자를 떠올리십니까? 벵엘을 통해 많은 초기 경건주의자들이 학문과 경건실천의 조화를 중시하며 교부들의 글을 살피던 해박한 사람들이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남을 가르치려 하는 자는 먼저 자신을 가르쳐야 한다는 벵엘의 말을 기억합시다. 실력 있는 경건한 그리스도인이 됩시다.


벵엘은 그가 하고 있던 교육자로서의 일을 무엇보다 소중히 여겼다. 이에 대한 증거로는 1720년부터 계속된 기센 대학과 튀빙엔 대학이 제안한 교수직을 단호히 거절한 것을 들 수 있다. 그가 당시에……한 말은 “내가 대학에서 달리 보임으로 세상에서 덧보이는 것은 나에게 가치가 없는 것이다. 나의 간절한 소망은 하늘로 향하는 것이다.”였다. 그가 교수직을 거부한 이유는 뎅켄도르프 기숙학교의 교직에 사명을 느꼈기 때문이다……그는 한 번도 연극이나 무도회에 참석하지 않았다. 그는 한 번도 자신을 위해서 유익한 휴가를 가진 적이 없었다. 그의 목회관은 “교회에서 일하는 사람들은 어미닭과 같다. 그의 병아리들을 그의 날개 아래 감싸야 하며, 병아리들이 어미닭의 등에 올라타고, 밟고 뛰어도 기쁨으로 참고 견뎌야 되는 것이다.”였다.[김영선, 『경건주의 이해: 아른트부터 웨슬리까지』 (서울: 대한기독교서회, 2013), 199-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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