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월 21일 슐라이어마허 “난 세계의 영혼이다. 세계의 힘, 생명을 내 것으로 느끼기 때문이다.”
오늘은 프리드리히 다니엘 에른스트 슐라이어마허(Friedrich Daniel Ernst Schleiermacher, 1768-1834)가 태어난 날입니다. 1768년 11월 21일, 슐라이어마허는 브레슬라우(Breslau)에서 개혁교회에 소속된 군목의 아들로 출생했습니다. 할레 대학교에서 수학한 슐라이어마허는 1796년에 목회를 시작했으며, 베를린대학교에서 신학교수직을 감당하기도 했습니다. 그는 신학을 하나님에 관한 학문으로 보지 않았고, 형이상학적인 사변을 거부했습니다. 이성이 아닌 마음으로만 하나님을 경험할 수 있다고 주장한 슐라이어마허는 종교란 단지 “느낌”(Gefuhl)과 경험일 뿐이라고 정의했습니다. 이러한 전제 속에서 신앙고백과 성경은 그 권위를 잃을 수밖에 없습니다.
“따라서 구속자는 인간 본성의 정체성에 의해 모든 사람들과 같지만 그의 하나님 의식의 일관된 효력으로 인해 그들 모두와 구별되며 이는 그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참된 존재였다.” 슐라이어마허는 그리스도의 신성을 성자가 인성을 취하셨다는 관점에서 해석하기보다 예수님 자신이 하나님과의 연합을 성취하도록 허용했을 때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존재가 인간적 본성에서부터 계발되었다.”고 말한다. 슐라이어마허는 동정녀 탄생 교리를 전설적이며 어떤 경우에도 그리스도의 인격에 있어서 비본질적인 것으로 간주했다. 그와 달리 하나님은 요셉에게 “보다 고상한 영향”을 끼치셔서 예수님은 죄 없는 상태로 보존되었다. 슐라이어마허는 놀랍도록 일관되게 처음 다섯 세기 동안의 삼위일체론 및 기독론 신조에 있어서의 모든 주요한 승리를 혼란스러운 “스콜라주의”, “유대교적이고 이교적인 요소들”로 인한 타락으로 해석한다. [Michael Horton, The Christian Faith, 이용중 역, 『언약적 관점에서 본 개혁주의 조직신학』 (서울: 부흥과개혁사, 2012), 482.]
슐라이어마허는 거듭남과 성화가 그리스도 안에 있지 않고 우리 안에 있음을 역설했는데, 이는 바울이 말한 바와 다릅니다. 그는 죄책감과 죄에 대해 충분히 강조하지 않았고, 예수 그리스도가 대속을 위해서가 아닌 모범을 보이기 위해 오셨다고 했는데, 우리는 이러한 주장을 받을 수 없습니다. 종교적 경험보다 중요한 것은 객관적 계시입니다.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믿고 따르는 그리스도인은 바른 체험을 중시합니다. 그러나 객차가 열차를 끌 수는 없는 노릇입니다. 하나님의 말씀과 성령을 앞에 둡시다. 주께서 따뜻한 정서, 결연한 의지를 더해주실 것입니다.
슐라이어마허는 유한자 안에 무한자를 깨닫게 되는 근원적인 소자가……있다고 한다. 즉 사람은 유한자 안에 비취는 무한자의 실체의 온전한 반영과 반사를 깨닫는다는데, 느낌과 관조를 통하여 깨닫게 된다고 한다. 이때 느낌은 능동적으로 감지하는 것이고, 관조는……신에 해당하는 우주를 알게 하는 지식 수용 능력이다. 슐라이어마허는 1879년의 유명한 책, 『종교론: 종교를 경멸하는 교양인에게 부치는 글』에서 이 느낌에 관하여 말한다. “나는 무한한 세계의 품에 안겨 있다. 나는 이 순간 무한한 세계의 영혼이다. 왜냐하면 나는 세계의 온 힘과 무한한 생명을 마치 나 자신의 것으로 느끼기 때문이다. 이 순간 무한한 세계는 나의 몸이다. 왜냐하면 나는 그 세계의 근육과 사지에 그것이 마치 내 자신의 것인 양 융화되고 있기 때문이다. 그 세계의 신경이 나의 감각과 나의 예감을 향하여 마치 내 자신의 신경인 양 움직여 오기 때문이다.” [김영재, 『기독교 교리사』 (수원: 합신대학원출판부, 2009), 1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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