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월 1일
“7계를 범한 개혁자”
1519년 1월 1일, 취리히의 종교개혁자 츠빙글리(Zwingli)는 강해설교 시리즈를 시작했습니다. 당시에는 성경을 책별로 강해하는 일이 드물었습니다. 그날그날 정해진 독본을 참조하여 관례적인 해석을 따르는 시대 속에서 츠빙글리의 목회방식은 많은 이들을 놀라게 하였습니다. 하지만 츠빙글리의 성경강해는 4세기 때의 크리소스톰과 어거스틴의 방식을 잇는 것이었습니다. 새해 첫날, 그는 회중들에게 앞으로의 목회계획을 밝힘으로 마태복음 강해설교를 시작했습니다. 마태복음 다음에는 사도행전, 디모데전·후서를 다루며 적용적인 결론을 이끌어내었습니다.
설교단에서 츠빙글리는 사람들이 일반적으로 잘 알고 있는 성직자의 도덕적 타락에 대해서 지적하였다. 그는 수도사들을 비판하되 아인찌델른에서 경험한 사실에 비추어 이들이 별로 하는 일도 없이 빈둥거리는데도 풍족하게 생활하는 것에 대해서 공격하고 회개를 촉구하였다. 그는 또한 성자숭배에 대해서 비판하였는데, 이루 헤아릴 수 없을 만큼 수많은 성자들을 기념하는 축제일, 성자들에 관하여 거짓말까지 곁들여 부풀린 전설적인 일화 등에 관해서 비판하였다. 츠빙글리는 세례 받지 않은 아이들은 저주받는다는 주장 또한 거부하였다. 설교단에서 츠빙글리는 부조리하고 불법이 활개 치는 사회 현실에 대해서도 지적하였다. 특별히 그는 세금 문제와 관련하여 농부들이 지주인 교회와 영주에게 수확의 1/10을 바치는 소출세를 공격하였다. 이 세금은 본래 성직자의 생활을 위해 거두어들인 것으로써 교회의 주된 수입원이었다.[대한예수교장로회총회교육부, 『16세기 종교개혁과 개혁교회의 유산』 (서울: 한국장로교출판사, 2003), 187.]
취리히 청빙과정 중 츠빙글리의 경쟁자에게는 아들 여섯이 있다는 소문이 있을 정도로 당시 상황은 좋지 않았습니다. 고귀 성직자는 이러한 일들을 묵인하는 조건으로 뇌물을 취했습니다. 그에 비하면 츠빙글리는 양심적이라고 할 수 있을지 모릅니다. 그러나 명백히 그는 칠계를 범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그를 회개케 하셨고, 종교개혁의 작업을 수행케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두 번째 기회를 주는 분이십니다. 복음의 능력, 보혈의 공로는 미끄러진 사람을 매장시키지 않습니다. 윤리적인 기준을 타협하지는 맙시다. 그러나 회개하고 다시 시작하는 사람 앞에서 하나님 노릇하며 정죄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이는 매우 민감한 문제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은 다시 일으키는 분이십니다. 츠빙글리에게 그러셨던 것처럼.
쯔빙글리는 개혁 운동을 이끌어가기에 좋지 못한 자질을 가지고 있었다. 그의 사생활에 도덕적 결함이 있었다. 사제로서 그는 독신 서약을 깨뜨렸다. 그는 1518년에 쮜리히에 있는 ‘위대한 사목회’(the Great Minister)의 한 참사회원에게 자기의 비행에 관한 편지를 보냈다. 그는 삼년 전에 순결을 지키는 삶을 살기로 결심했고 그 후 글라루스를 떠나기 전 반년간과 아인지델른에서의 처음 일 년간 그 결심을 지켰다. 그러다가 그는 여인의 유혹에 넘어가고 말았다. 이제 그는 자신의 약점을 알고 있으나 비너스의 쇠사슬에 얽매이지는 않았다고 편지했다.[John T. McNeil, The History and Character of Calvinism, 정성구·양낙흥 역, 『칼빈주의 역사와 성격』 (서울: 크리스챤다이제스트, 1990), 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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