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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45년 1월 10일, 윌리엄 로드(William Laud, 1573-1645) 처형, "주교 없이 진정한 교회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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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월 10일

“청교도의 귀를 자른 대주교”

오늘은 영국의 캔터베리 대주교 윌리엄 로드(William Laud, 1573-1645)가 처형당한 날입니다. 1645년 1월 10일, 반역죄로 체포된 후 런던탑에 투옥되어 있던 윌리엄 로드는 참수형을 받았습니다. 1633년에 로드는 캔터베리 대주교(Archbishop of Canterbury)가 되었습니다. 캔터베리 대주교는 영국 대부분을 관할하는 대주교로서 권한이 막강했습니다. 그는 찰스 1세의 충신으로서 청교도를 억압했는데, 많은 이들이 그의 핍박을 피해 네덜란드나 미국으로 피신하였습니다.

1628년 런던의 주교가 된 윌리엄 로드(William Laud)는 가톨릭적인 성향이 강한 사람으로서 국왕 찰스 1세를 절대적으로 지지하며 청교도를 증오했다. 그는 성공회를 좀 더 가톨릭에 가까운 쪽으로 끌고 가려 했으며, 국교회에 대한 순종을 강요하며 불순종주의자들에 대한 탄압의 강도를 높여갔다. 결국 청교도들은 영국에 남아 있으면서 국교회의 신학과 예전을 받아들이든지, 영국을 떠나든지, 아니면 내전을 치러야 하는 상황에 직면하고 있었다.[류대영, 『미국종교사』 (파주: 청년사, 2007), 83-84.]

로드는 찰스 1세의 허가를 얻어 성공회의 예전, 예복, 주교제를 강화했습니다. 강압적으로 사용하게 한 예식서에 로마가톨릭적인 요소가 있음을 간파한 청교도들은 반발했으나, 로드는 이들을 잡아들여 양쪽 귀를 잘라 내거나 부당한 벌금형을 부과했습니다. 양쪽 뺨에 인두로 낙인을 찍으며 핍박했던 로드의 정책은 결국 실패로 돌아갔습니다. 1639년에 스코틀랜드에서 반란이 일어났고, 이듬해 찰스 1세가 군비를 충당하기 위해 어쩔 수 없이 장기의회를 열자, 의회파는 로드를 탄핵했습니다. 사실 로드의 가장 큰 탄압은 신학적인 것이었습니다. 그는 1630년에는 옥스퍼드 총장(Chancellor)으로 임명되면서 칼빈주의를 강하게 비난했습니다. 로드는 옥스퍼드 내에서 벌어진 예정설 논쟁에 개입하여 알미니우스파 국교회가 승리하도록 했습니다. 캠브리지에서도 은혜의 교리는 설 곳을 잃었고, 칼빈주의와 관련된 논문과 책들은 검열을 받아야 했습니다. 로드는 1618년에 공포된 “스포츠의 서”(The King’s Book of Sports)를 재공포하여 주일 오후에 교구민들이 각종 스포츠를 즐길 것을 권장했습니다. 이는 온전한 주일성수를 법적으로 차단한 것이었습니다. 결국 그는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습니다. 하나님은 반드시 악인을 심판하십니다. 로드의 치하에서 고난을 이겨낸 모든 신앙인들에게 고개 숙여 존경의 인사를 드리고 싶습니다.

1604년 7월 6일에 로드는 신학사 학위를 받았다. 그리고 칼빈주의자들을 대대적으로 공격하기 시작했다……로드의 주장은 두 가지였다. 하나는 세례의 필요성이요, 다른 하나는 주교 없이 진정한 교회는 없다는 것이었다……그는 벨라미 추기경으로부터 주장의 근거를 끌어왔다.[John Parker Lawson, LIfe and Times of William Laud: Archbishop of Canterbury Vol. 1, 102-1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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