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월 17일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의 승인”
오늘은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the Heidelberg Catechism)이 승인된 날입니다. 1563년 1월 17일, 팔츠의 선제후(Elector Palatine) 프리드리히 3세가 소집한 종교 회의에서는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을 승인하였습니다. 선제후란 황제 선거권을 가진 유력한 통치자를 말합니다. 프리드리히 3세는 아내 마리아를 통해서 종교개혁 신앙을 받아들였지만, 이로 인해 오랜 시간 무명의 왕족으로 지내야 했습니다. 그는 선제후가 된 후 공개토론을 통해 칼빈의 신학을 지지하게 되었습니다. 팔츠의 새로운 선제후는 28세의 경건한 교수 우르시누스(Zacharias Ursinus)와 26세의 웅변적 설교자 올레비아누스(Kaspar Olevianus)에게 요리문답 작성을 요청했습니다. 종교회의(Synod)는 그들의 요리문답 초안을 검토하기 위해 소집된 것입니다.
1563년 1월, 목사들과 교사들이 하이델베르크에 도착하기 시작했다. 선제후가 그달 9일에 모임을 시작하기 위해 그들을 소집한 것이었다. 하이델베르크에 이처럼 많은 설교자들과 교사들이 함께 모인 것은 요 몇 년 동안에 없었던 일이었다. 그들은 모임 장소인 ‘지혜의 대학’을 드나들었다. 그들이 성신교회 앞의 광장을 가로질러 갈 때는 겨울바람에 그들의 검은 외투가 펄럭였다. 선제후가 소집한 사람들은 새 요리문답을 주의 깊게 검토했다. 그들은 그 요리문답을 연구하고 그에 대해 토론도 했다. “순서가 로마서를 생각나게 합니다”하고 누군가가 말했다. “요리문답 전체의 기조가 평안과 위로여서 좋습니다”하고 다른 사람이 말했다.[Thea B. Van Halsema, Three Men Came to Heidelberg and Glorious Heretic: The Story of Guido de Bres, 강변교회 청소년학교 도서위원회 역, 『하이델베르크에 온 세 사람과 귀도 드 브레』 (서울: 성약, 2006), 57-58.]
1월 11일부터 모인 종교회의를 통해 승인된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의 서문은 프리드리히 3세가 직접 작성했습니다. 팔츠 영방의 백성들을 자신의 양으로 생각하고 인재를 모으고, 회의를 소집하며, 어려움을 이겨낸 선제후가 존경스럽습니다. 그는 종교개혁 운동으로 트리에르(Trier)에 투옥된 올레비아누스를 데려오기 위해 많은 돈을 몸값으로 지불했습니다. 성경을 만 번 읽는다 해도, 요리문답과 신앙고백이 없다면 어둠 속을 헤맬 수도 있습니다. 프리드리히 3세처럼 말씀의 꼴을 위해 기꺼이 대가를 지불하는 영적 지도자들이 많이 일어나기를 기도합니다.
대학 도시이며, 당시 팔츠(Pfalz)의 수도였던 하이델베르크에는 루터교회의 강경파 신학자들이 있었는가 하면, 멜랑흐톤을 따르는 온건한 신학자들도 있었으며, 또한 츠빙글리나 칼빈의 영향을 받은 개혁주의 신학자들도 있어서 신학 문제를 두고 격론을 벌일 때가 많았다. 팔츠의 선제후 프리드리히 3세(Friedrich Ⅲ, 1559-1576)는 신학적인 대립이 자칫 정치적인 분열로 비화될 가능성을 우려하여 이러한 신학적인 이견들을 조정하는 일에 관심을 기울였다. 그는 자신이 성만찬에 관하여 올바른 신학적인 이해를 가지고자 성경을 탐독하며 연구하는 한편, 신학적으로 여러 다른 견해를 조정할 수 있는 요리문답서를 작성하도록 배려하였다.[김영재 편저, 『기독교 신앙고백』 (수원: 영음사, 2011), 158-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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