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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신이 재주를 피운다" 한국 최초의 여의사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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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http://mnews.joins.com/article/20516647




박에스더 한국 최초의 여의사

1. 서양의학이 막 들어오던 때

삼국시대 중국으로부터 한방의학이 전래된 이래 최초로 서양의학이 전래된 것은,1880년 지석영이일본에서 종두법을 연구,1882년 전주에 우두국을 설치 교육시킴으로부터 이다. 그러나 사실상의 시작은 1884년 9월 20일 미국 공사관 공의로 입국한 알렌(Allen,Herace Newton)에 의해서이다. 그리고 서양의학의 보다 더 적극적인 활동은, 그후 1885년 5월 3일 감리교의 정식 의료선교사로 내한한 스크랜톤(Scranton,William Benton)에 의해서이다. 그는 알렌의 요청으로 제중원에서 잠시 도와주다가,다음 달인 6월 20일 어머니 (Mrs.M.F.Scranton)와 그의 부인이 도착하자,단독으로 9월 10일부터 정동 주책에서 의료사업을 시작하여,그 이름을 정동제 1병원(The First Methodist Hospital)이라고 하였다.

그는 이렇게 병원을 개설한후 찾아오는 환자만 치료해준 것이 아니라, 아현동이나 상동 등지에 진료소를 개설하고 무료 진료를 하며,병원없는 지역을 순회하며 가난하고 병들어 "버림받게 된 자"를 치료해 줌으로, 장로교회의 병원사업과 의사양성에 집중된 것과는 달리,빈민위주의 정책을 펴나갔다. 이렇게 의료사업을 하는가운데,스크랜톤 母子는,남자에게는 진찰을 절대 받지 않으려는 부인들이나 또 소외당한 어린이들을 보고,선교부에 여의사 파송을 청원함으로 1887년 10월 20일 메타 하워드(Miss Meta Howard.M.D)가 내한하여,정동 이화학당 구내에 한국 최초의 부인병원인 보구여관(Caring for and Saving Woman's Hospital)을 개설하였다.

메타 하워드는 애석하게도 2년만에 건강상 이유로 귀국하고, 그 후임으로 1890년 10월 로제타 셔우드(Miss Rosetta Sher Wood,M.D)가 부임하였는데,그는 오자마자 "여성을 위한 의료사업은 여성의 힘으로"라는 표어를 내어걸고,의료사업과 함께 여성들을 모아놓고 의료강습을 시작하였다. 이 선교사가 바로 에스더를 의사로서 키워준 선교사이다.

2. 김점동이 박에스더로

박에스더(Mrs Esther Kim Park,본명 점동)는 1876년 3월 16일,정동부근에서 가난하게 사는 김씨의 딸 4형제 가운데 세째로 태어났다. 그가 태어나서 10년쯤 되었을 때,아펜젤러가 그곳에 땅과 집을 사서 정동교회와 학교를 시작하게 되었는데, 그의 아버지는 가난하던터라 아펜젤러에게 고용이 되어 일하게 되었다. 여기서부터 에스더의 집안은 개화의 물결이 서서히 스며들기 시작하였고,그리고 에스더에게는 신학문에 접할 수 있는 좋은 기회가 주어지게 되었다. 그래서 아펜젤러의 소개로 이화학당에 입학하게 되었다. 그때의 이화학당은 스크랜톤 부인에 의해서 막 문을 열었던 때였던 때가 때인만치 문을 열어 놓았지만 들어오는 학생이 많지 아니하였다.

모처럼 한두명이 들어왔다가도 도중에 나가버려 자리가 잡히지 아니한 때였다. 이화 80년사에 보면,이렇게 엉터리로 모이는 학생들이었지만 1888년 10월에는 학생이 4며으로 늘고 연말에는 7명이 되기도 하였는데 여기서 졸업할 수 있었던 학생은 1명 뿐었다고 한다. 이러한 때(1887년)에스더는 입학을 하고 이미 들어온 3명의 학생과 함께 배우기 시작하였다. 여기에서 신학문만이 아니라 긷고교의 복음과 접하게 되었고 회심의 경험까지 하기에 이르렀다. 1888년 어느 폭풍우 심한 날 밤이었다. 천둥번개와 함께 쏟아지는 빗소리를 들으며,기도하던 중,노아 홍수때의 하나님의 무서운 심판이 생각되었고,그것을 무서워 하던 나머지,자신의 죄를 회개하고 하나님의 용서와 사랑의 은혜를 깨닫게 되었다. 그때 그는 일생을 하나님께 헌신하기로 결심하였다.

그리고 그후 세례를 받고 에스더라는 세례명을 받았다. 마치 다메섹도상의 사울이 바울로 변하듯이 여기서부터 그의 생애에 있어서 김점동이 에스더로 변하는 전기가 되었다.

3. 홀부인의 특별한 조수

1890년 이화학당을 졸업한 에스더는 영어를 잘 함으로,그해 10월에 내한하여 보구여관에서 일하고 있던 로제타 셔우드의 통역을 맡는 한편,틈틈히 그로부터 의학을 배우며 신앙심으로 길리움 받았다. 이때부터 그는 일생동안을 헌신할 방향이 의학계로 기울기 시작한 것 같다. 그러나 의사가 칼을 들고 수술하는 것을 보고는 끔찍하게 생각하여 좋아하지는 아니하였다.

그러던 어느날 언청이를 감쪽같이 수술하는 것을 보고는, 마음이 달라져 기어코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의사가 되어보겠다는 굳은 결심을 하기에 이르렀다. 1892년 보구여관이 동대문 분원을 설치하고 볼드윈 시약소(Boldwin Dispensary)라 이름하였을 때,에스더는 로제타 셔우드를 따라가서 특별히 뽑힌 학생으로써 약을 짓고 환자를 간호했다.1892년 6월에는 로제타 셔우드가 1891년에 내한한 제임스홀(Hall,William James,M.D)과 결혼을 하고,그해 7월 그들이 평양선교 기지 개척자로 임명을 받게되자,로제타 셔우드는 그의 동생이 필요해서 에스더를 불러 주용히 물어 보았다.

그때 대답이 ["하나님이 길을 열어 주시는데는 어느 곳이라도 가겠습니다. 비록 사람들이 나를 죽인다고 할지라도 하나님의 뜻을 전하는 일에 내 목숨을 내 놓겠습니다."] 라고 이러한 결심을 들은 홀부인 (로제타 셔우드가 홀과 결혼함으로 이제부터는 이렇게 칭함)은 결혼을 시켜 데리고 갈 생각을 하였다. 그래서 닥터 홀이 데리고 있던 24세된 청년 박유산과 1893년 5월 24일 결혼을 하였다. 그리고 1894년 5월 4일 닥터 홀의 가족과 함께 평양으로 가서 "홀부인의 특별한 조수"가 되었다.

4. 최초의 여의사

닥터 홀의 가족과 함께 평양에 도착한 에스더 가족은 단순한 조력자 이상이었다. 즉 저 유명한 김창식의 평양 핍박사건때 박유산은 매를 맞기도 하였고,에스더는 홀부인과 함께 가마를 타고 그 위험한 상황 가운데서도 진료소로 출근해서 병자들을 돌봐 주었다. 1894년 청.일전쟁 후 각종 전염병이 창궐한 평양에서,혼자 남아 치료하다가,발진티푸스에 걸려,한국선교 3년 평양선교 2년 4개월만에,닥터 홀이 그의 생을 마치자,홀의 가족은 귀국하게 되었는데,그때에 에스더 가족도 함께 따라가게 되었다. 그리고 1895년 2월이 되자,에스더는 리버티 공립학교에 입학을 하였고, 그녀의 남편은 셔우드가(家)의 농장일을 도우면서,에스더의 학업을 도와 주었다. 그해 9월에 에스더는 뉴욕시의 유아병원에 들어가,그곳에서 1년이상 근무하면서 생활비를 버는 한편 개인 교수를 찾아 라틴어 물리학,수학을 공부하였다.

1896년 10월 1일에는 볼티모 여자의과대학(Woman's Medical College of Baltimore)에 입학하였다. 1900년에는 마침내 이 학교를 졸업하고,한국인으로서는 최초로 의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이때 나이는 겨우 24세를 넘은 때였으니 얼마나 장한 쾌거인가?그러나 그때 그의 반려자를 잃었으니,학위는 받았지만 기쁜줄은 몰랐다. 그것은 그의 남편인 박유산이 에스더의 졸업을 20여일 앞두고 뇌일혈로 사망했기 때문이었다. 이로 인해서 그는 곧 귀국하게 되었는데, 그의 귀국은 금의환양이 되지 못하고,오히려 여러 사람들의 눈시울을 적시게하는 것이 되고 말았다.

5. 순교자의 대열에

이러헥 귀국한 에스더는 또다시 평양에서 홀부인과 만났다. 과거는 미숙한 조수였지만 이제는 어엿한 동역자로 그와 힘을 합쳐 의료사업에 종사하게 되었다. 그를 도와 광혜여원의 건물을 신축하며,한국 최초의 간호원 양성소를 개설하였다. 그의 이러한 수교가 인정이 되어,1908년 4월 28일에는 신사숙녀 7,800여명이 모인 자리에서 고종황제로부터 치하를 받기도 하였다. 1888년 소녀로써 일생을 하나님 앞에 헌신하기로 약속했던 그는, 그동안 수없는 난관을 극복하면서 일해 왔던 것이다. 이제 그는 한 의사로서는 경험으로서나, 또는 한 신앙인으로써의 인격으로서 한참 무르익을 즈음에, 그의 생애에 일대 불행을 만나게 되었는데,그것은 곧 폐침윤에 걸려 쓰러지게 된 것이다. 그는 결국 그 병에서 일어나지 못하고,1910년 4월 13일 34세를 일기로 영원히 잠들고 말았다.

에스더의 죽음은 그를 아는 모든 이들을 슬프게 했지만,그 가운데 가장 가깝게 지냈던 홀부인의 가족을 더 슬프게 하였다. 이로 인해서 닥터 홀의 아들인 셔우드는 장차 결핵 전문의가 되어 한국에 와서 꼭 결핵요양소를 설립하여야겠다는 결심을 갖게 되었고, 그후 1928년에는 그의 결심대로 해주에 최초의 요양소 및 결핵전문 교육기관을 설립하였다. 그리고 1932년에는 최초로 결핵퇴치를 위해 "크리스마스 실"을 도입하였다. 1912년까지 감리교회 의료기관에서 일한 이들은 모두 12명이고,그 가운데 선교사가 11명 동양인으로는 유일한 여박사 에스더뿐이었다.그런데 그 가운데 이 땅을 위해 그의 아까운 생명을 바친이는 12명 가운데 5명으로,아펜 젤러 전기 작가인 그리피스(William E.Criffis)의 말대로,"박에스더는 유일하게 순교자의 숭고한 대열"에 끼이는 영광을 차지하였다.

출처: http://kcm.co.kr/person/person_k059.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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