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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59년 2월 10일, 조나단 고포드(Jonathan Goforth) 출생, "중국에서 사역한 최초의 캐나다 장로교 선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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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월 10일 “녹슬기를 거부한 선교사”

1859년 2월 10일, 중국에서 사역한 최초의 캐나다 장로교 선교사 조나단 고포드(Jonathan Goforth)가 태어났습니다. 토론토 대학교의 낙스 칼리지(Knox College)에서 공부한 고포드는 재학시절부터 해외선교의 중요성을 강조했습니다. 고포드는 1885년에 아내와 함께 중국에 건너가 허난 성(Henan)에서 선교하였습니다. 고포드 부부는 11명의 자녀들 중 5명을 중국에서 잃었고, 의화단의 난(The Boxer Rebellion, 1900년)을 피해 도망하던 중 자상을 입기도 했습니다.

고포드는 1859년 온타리오(Ontario)주의 서부에 있는 한 마을에서 11명의 자녀 중 일곱 번째로 태어났다. 그는 18세 때 회심하였는데 「로버트 머레이 멕체인의 회상록」을 읽고서 즉시 하나님의 선교사역에 헌신하였다. 그가 선교의 소명에 응답하게 된 것은 대만에서 활동한 베테랑 선교사 조지 맥케이(George Mackay) 박사의 감동적인 설교를 듣고 나서부터였다. 맥케이 선교사는 순회 강연중 “2년 동안…캐나다의 여러 곳을 돌아다니며 젊은이들에게 대만에 건너와 선교사역에 헌신하라는 도전을 주었다.” 그러나 그의 여행은 별다른 소득이 없었다. 그래서 그는 헛수고만 하고 그가 벌여놓은 선교 사업을 마무리하기 위해 대만으로 돌아갈 수밖에 없었다. 이때 맥케이의 설교가 젊은 고포드의 마음에 깊은 감동을 주었다. “나는 그의 설교를 들으면서 부끄러워 견딜 수가 없었다…그때부터 나는 해외선교를 위한 선교사가 되기로 결심하였다.”[Ruth A. Tucker, From Jerusalem to Irian Jaya: A Biographical History of Christian Missions, 박해근 역, 『선교사 열전』 (고양: 크리스챤다이제스트, 1990), 240-41.]

고포드는 사생활을 포기하고 자기 집을 개방하여 방문객들에게 복음을 전했습니다. 그는 순회전도자였습니다. 평양대부흥을 목격한 고포드는 중국으로 돌아가 만주대부흥(Manchurian revival)의 주역이 되었습니다. 고포드와 그의 동역자들은 중국교회의 부흥을 위해 매일 오후 4시에 기도했습니다. 73세 노인 선교사는 은퇴를 모르고 부흥회를 인도했습니다. 거의 볼 수 없는 상태에서도 믿음과 회개를 촉구했습니다. 캐나다에 돌아가서도 500회 이상 순회하며 설교했던 고포드는 녹슬기를 거절한 탁월한 전도자였습니다. 평양대부흥의 영향력이 그를 통해 중국에 흘러간 사실이 놀랍습니다. 한국교회가 계속해서 선한 영향력의 진원지가 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한국의 8개 주요 선교지를 방문하며 대부흥운동의 현장을 직접 확인하고 대각성운동의 목격자가 된 고포드는 돌아가 중국 목단(牧丹)의 교우들에게 이 소식을 전해 주었고 이 소식을 전해 받은 중국교인들은 큰 도전을 받고 자신들에게도 그 같은 은혜가 임하기를 간절히 기도했다. 그가 초대를 받은 지쿵산(Chi Kung Shan)교회에도 평양대부흥운동의 소식이 전달되었다. 주일 저녁 그 소식을 들려주었는데도 예배를 마칠 때까지 반응이 없다 축도를 마치고 약 6분간 적막이 흐른 후 갑자기 회중들 가운데 통회의 역사가 나타났다. 많은 이들이 자신들의 죄를 고백하고 간절히 주님께 용서를 구하는 바람에 그날 집회는 보통보다 늦게 끝났다. 이 같은 일은 전에는 없었던 강력한 성령의 임재였다. 고포드가 증언한 대로 그곳에서의 사경회와 기도회는 그 후 4일간 계속되었고, 하나님의 능력이 놀랍게 현시되었다.[박용규, 『한국기독교회사 1』 (서울: 생명의말씀사, 2004), 9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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