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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월 26일 누가복음 22장 “예수님 닮은 섬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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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월 26일 누가복음 22장 “예수님 닮은 섬김”

“너희는 그렇지 않을지니 너희 중에 큰 자는 젊은 자와 같고 다스리는 자는 섬기는 자와 같을지니라”(누가복음 22:26)

예수께서 잡하시기 전 제자들과 마지막 식사를 하십니다. 하지만 어리석게도, 참으로 어리석게도 제자들은 이 영광스러운 자리에서 싸우고 있습니다. 서열 논쟁이 붙은 것입니다. 이러한 머리 싸움은 특정 민족에만 해당되지 않습니다. 모든 죄인들의 모임은 이러한 알력과 갈등의 요소를 담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어리석은 제자들을 마지막까지 사랑으로 가르치십니다. “내가 너희들을 섬기고 죄인들을 섬기지 않았는냐? 너희도 마땅히 그래야 할 것이다. 감투를 쓰고, 높은 자리에 오르는 것은 믿지 않는 사람들이 몰두하는 문제이니 너희와는 상관없는 일이다.” 이것이 사역입니다. “사역” 뜻하는 영어단어에는 “작은(mini)”이라는 말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기독교 사역은 기꺼이 작은 자가 되는 것입니다. 높은 사람이 되는 것을 포기하는데서 참된 성경적 봉사가 시작됩니다. 감투를 원한다면 정치를 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교회에서는 가장 작은 사람이 되어 묵묵히 봉사하는 자가 제일 큽니다. 이것이 사역의 자세입니다.

실로, 이 하나님이 제정한 구원의 인간적 방편을 “사역(ministry)”이라고 부르는 이유는 그것이 결코 영혼에 대한 관리권이 아니라 사람이 하나님의 뜻에 따라 다른 형제들에게 제공하는 하나의 봉사 행위이기 때문이다. 즉, “사역”이란 영혼에 대한 권리를 가지고 있어서 그 도움 없이는 아무도 구원의 은혜를 소유할 수 없는 “사제권”이 아니며, 따라서 신약 교회 안에는 사제와 평신도의 대립이 없다. 신자는 함께 제사장 나라이다. 부카누스는 말한다: “왜 당신은 그것을 사역이라고 부르는가? 그것이 권세(ἀρχή)나 우선권이나 주재권이나 통치권이 아니라 돌봄과 섬김(επιμέλεια kaí διακονία), 즉 봉사 사역(λῃτουργία, ministerium)과 동일한 것이기 때문이다. 교회의 사역자들은 교인들과 직분자들에게 군림하며 그들을 향해 법을 제정하고 시민권을 결정하는 권리를 행사하는 주관자들이 아니다. 오히려 그들은 하나이신 왕 중의 왕, 군주 중의 군주를 섬기는 종 혹은 사역자들이다. 그리스도는 구체적으로 말씀을 통하여, 그리고 모범을 통하여, 사역자들에게 주권을 금지하였다. 베드로도 그렇게 말하였다. ‘맡기운 자들에게 주장하는 자세를 하지 말고 오직 양 무리의 본이 되라’(벧전 5:3).”[Heinrich Heppe, Reformierte Dogmatik, 이정석 역, 『개혁파 정통교의학』 (고양: 크리스챤다이제스트, 2007), 951.]

그러나 보니파키우스 8세(Boniface Ⅷ)를 비롯한 교황은 자신이 사도 베드로의 후계자라고 주장하며 스스로 높은 자리를 취했습니다. “그들이 여짜오되 주여 보소서 여기 검 둘이 있나이다 대답하시되 족하다 하시니라”(눅 22:38). 자칭 베드로의 후계자들은 이 말씀을 편의대로 해석하면서, 영적인 검과 세속적인 검이 모두 교회의 권력 안에 있다고 주장합니다. 저들은 콘스탄티누스 대제가 세속권력과 교권을 로마 주교에게 헌정했다는 거짓 문서까지 만들어가며 권위를 내세웠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의 말씀에 비추어 볼 때 이는 모두 악인들의 속임수에 불과합니다. 부당한 재판과 죽음을 몇 시간 앞두고서도 묵묵히 제자들을 섬기셨던 예수님 앞에서 크고자 하는 몸짓과 목소리는 어울리지 않습니다.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셨던 그리스도의 묵묵한 섬김을 받은 사람은 결코 드러나는 것을 즐겨하지 않습니다. 여기 저기 옳은 목소리가 난무하지만 진정한 변화가 일어나지 않는 것은 예수님 닮은 섬김이 없어서가 아닐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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