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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1년 4월 5일, 로제타 셔우드 홀(Rosetta Sherwood Hall, 1865-1951) 별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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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월 5일 “로제타 셔우드 홀(Rosetta Sherwood Hall), 남편과 딸을 잃은 땅에서의 43년”

오늘은 로제타 셔우드 홀(Rosetta Sherwood Hall, 1865-1951)이 별세한 날입니다. 1951년 4월 5일, 셔우드 홀(한국이름은 허을[許乙]) 여사는 뉴저지에서 하나님의 부름을 받았습니다. 펜실베이니아 여자의과대학에서 공부한 홀 여사는 1890년에 의료선교사로 내한하였습니다. 그녀는 1892년에 제임스 홀(William James Hall)과 결혼했지만, 남편은 과로와 발진티푸스로 인해 순직하고 말았습니다. 결혼한 지 2년 5개월 만의 일이었습니다. 홀 여사가 결혼 전 보구여관에서 16세의 윤씨 성을 가진 소녀를 희생적으로 치료한 기록을 살펴봅시다. 닥터 홀은 식피수술을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을 돕기 위해 직접 자신의 피부를 잘라 이식해 주었습니다.

환자는 열여섯 살 난 소녀로 약 50킬로미터나 떨어진 시골에서 가마를 타고 왔다. 소녀는 몇 년 전에 입은 화상으로 손가락 세 개가 손바닥에 붙어 있었다……나는 이 소녀를 입원시킨 후 에테르로 마취를 시킨 다음 수술을 했다. 수술한 손가락마다 붕대를 따로 감고 즉시 손가락들을 펴서 부목을 대어 단단히 맸다. 방부 처리를 하고 시술했는데 매우 성공적이었다……매우 조심스레 그녀의 손에 남아 있는 피부를 늘려서 상처를 덮었으나 피부가 모자라서 보기 싫은 흉터가 남게 되었다……그래서 먼저 내 몸에서 피부를 떼어낸 다음 환자의 몸에서 필요한 피부를 떼어내려고 했지만 환자는 나의 의도를 알아차리지 못했다……로드윌러 양과 벵겔 양이 자기들의 피부를 떼도록 허락했고 학교에서 말괄량이로 불렸던 봉업이도 팔을 내밀고 피부를 떼라고 했다. 이 소녀는 어찌나 용감했든지 한 번도 움찔거리지 않았다. 그리고 환자인 미스 윤도 자기 몸에서 피부를 떼게 했고 누이동생을 찾아왔던 그녀의 오빠도 피부를 제공했다. 그래서 한 번에 서너 개의 피부를 붙였고 30여 개의 식피수술을 했다. 그 중 8개의 식피가 성공하여 흉터가 거의 가려져 상처가 다 아물었다.[Sherwood Hall, With Stethoscope in Asia: Korea, 김동열 역, 『닥터 홀의 조선회상』 (서울: 좋은 씨앗, 2003),76-77.]

남편이 죽을 당시 그녀는 임신 중이었습니다. 두 살 난 아들도 있었습니다. 로제타 홀은 미국에서 출산한 후 아이들과 함께 한국으로 돌아왔습니다. 그리고 1935년에 건강 악화로 선교사직을 사임할 때까지 43년간 이 땅의 영혼들을 위해 봉사했습니다. 사랑하는 남편과 딸을 먼저 보낸 상황 속에서 로제타 홀이 이룬 일들이 놀랍기만 합니다. “내가 한 것이 아니요 오직 나와 함께 하신 하나님의 은혜로라”(고전 15:10). 은혜는 절망 속에서도 꽃을 피우고, 열매 맺게 합니다.

1898년 광혜여원을 개원하면서 홀 부인은 어려서 죽은 딸 에디스를 추모하는 뜻에서 ‘에디스 마거릿 어린이 병동(Edith Margaret Children Wards)’을 짓기 시작하여 1899년에 완성하였다. 그녀는 이곳에서 어린이 진료사업과 함께 방 1칸에서 한국 최초의 맹인학교를 시작하였다. 홀 부인은 1894년 평양주재 전도사 오석형의 딸인 오봉래를 만난 후 맹인들을 위한 치료와 점자 교육 사업을 구상하였고, 1898년 다시 한국으로 오면서 뉴욕 점자를 개조한 점자책으로 오봉래를 가르치다가 마침내 체계화된 학교를 시작하게 되었다. 1900년 맹인학교에는 4명의 학생이 있었다. 그 후 평양여학교에 맹인반이 만들어졌고, 이는 평양맹아학교로 발전되었다.[이만열, 『한국기독교의료사』 (서울: 아카넷, 2003), 1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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