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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0년 4월 13일, 한국최초의 여성 의사 박에스더(1876-1910) 별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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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월 13일 “박에스더(1876-1910), 사람을 세우는 희생”

오늘은 박에스더가 별세한 날입니다. 1910년 4월 13일, 한국최초의 여성 의사 박에스더는 34세의 나이에 폐결핵으로 사망했습니다. 그녀의 죽음에 충격을 받은 셔우드 홀(제임스 홀과 로제타의 아들)은 결핵을 공부하여 조선에 결핵요양원을 세울 것을 결심했습니다. 박에스더의 본명은 점동(點童)입니다. 밥 먹는 일 밖에 몰랐던 김점동은 스크랜턴 부인 밑에서 교육을 받고, 로제타 선교사의 통역사로 일하던 중 의사에 대한 꿈을 키우게 됩니다. 박에스더는 남편과 함께 미국으로 건너가 뉴욕 리버티 공립학교와 볼티모어 여자의과대학에서 공부한 후 1900년 6월에 학위를 취득했습니다. 뒷바라지하던 남편은 졸업식을 보지 못하고 폐결핵으로 죽고 말았습니다.

세례 받기 전인 1888년 어느 여름, 폭풍우가 몰아치던 밤이었다. 기숙사 방 안에 있던 열두 살 소녀 김점동은 두려움에 사로잡혔다. 선교사들이 설교시간에 들려주었던 노아의 홍수 이야기가 생각났다. 무자비한 하나님의 심판이 공포 속에 그를 사로잡았다. 이와 함께 죄에 대한 뚜렷하고도 두려운 인식이 엄습하면서 영혼의 불안을 느끼게 되었다. 그런데 그 방에 같이 있던 동료 학생도 마침 그 순간에 김정동과 똑같이 노아 홍수와 죄를 생각하고 있었음을 서로 확인하게 되었고, 여기에서 신비함을 느낀 두 소녀는 무릎을 꿇고 기도하기 시작했다. 죄를 자백하며 구원을 비는 기도가 계속되면서 두려움과 불신이 사라지고 마음속에 확신과 평안이 가득 차게 되는 신앙체험이 이루어졌다. 김점동의 인생을 변화시킨 ‘위대한 밤’이었다. 이튿날부터 그는 동료 학생들과 함께 정기기도회를 갖기 시작했다. 찬송과 기도로 이루어지는 이 기도회는 학생들뿐 아니라 선교사들에게도 깊은 감명을 주었다. 믿음의 확신을 얻은 김점동은 다른 동료 학생 두 명과 함께 세례를 받았고 ‘김에스더’로서 제2의 인생을 살기 시작하였다.[이덕주, 『한국교회 처음 여성들』 (서울: 홍성사, 2007), 60.]

그녀는 박유산과 서양식으로 결혼하면서 김에스더에서 박에스더로 성을 바꾸었습니다. 박에스더의 미국 유학은 여러 사람의 도움이 있었기에 가능했습니다. 남편을 잃은 홀 선교사는 슬픔 중에도 에스더를 잊지 않았습니다. 홀 부인은 박에스더와 박유산 부부가 미국에 오는 것을 도와주었고, 에스더가 뉴욕 아동 병원에서 일하며 공부할 수 있도록 배려해 주었습니다. 남편 박유산은 6년간 농장에서 일하며 학비와 생활비를 조달했습니다. 무리한 노동 중 급성 폐결핵으로 별세한 박유산은 볼티모어 공동묘지에 묻혔습니다. 한 사람을 세우는 데에는 눈물어린 기도와 희생이 요구됩니다. 사람을 키우기 위해 가정과 교회에서 어떤 투자를 하고 있는지 돌아봅시다.

당시 여성들의 경우는 병이 들어도 남자에게 몸을 보일 수 없다는 이유로 치료를 포기하는 일이 많았기에, 홀이 운영하던 보구여관은 “여성을 위한 의료사업은 여성의 몸으로”라는 표어를 내걸었다. 이제 그 표어를 실천하게 된 박에스더는 개복수술을 성공적으로 해서 장안의 화제가 되기도 했다. 박에스더는 또 틈만 나면 당나귀를 타고 벽촌으로 다니면서 환자들을 무료 진료했다. 그녀는 귀국 후 처음 10달 동안 3000명의 환자를 볼 정도로 헌신적이고 정열적으로 일했으며, “귀신이 재주를 피운다”는 소문이 날 정도로 명성이 자자했다.[강준만, 『한국 근대사 산책 4: 러일전쟁에서 한국군 해산까지』 (서울: 인물과사상사, 2007), 2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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