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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 칼빈, 『기독교 강요』2.8.51-55 율법의 요체, 둘째 돌판만을 언급하는 이유, 믿음과 사랑, 이웃에 대한 사랑, 이웃에 대한 사랑의 범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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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율법의 원칙들을 그리스도의 가르침에 비추어 본다. 51-59)


51. 율법의 개요


이제 율법 전체의 목적을 결정하는 것은 어렵지 않을 것이다. 즉, 의를 실현해서 하나님의 순결을 본받아 인간 생활을 이루어 나가라는 것이다. 하나님은 율법에서 자기의 성격을 충분히 묘사하셨기 때문에 율법의 명령들을 수행하는 사람은 자기의 생활에서 이를테면 하나님의 형상을 나타낸다고 할 것이다. 그래서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율법의 요점을 상기시키고자 다음과 같이 말했다. "이스라엘아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요구하시는 것이 무엇이냐 곧 네 하나님 여호와를 경외하여 그 모든 도를 행하고 그를 사랑하며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섬기고‥‥‥규례를 지킬 것이 아니냐"(신 10:12-13). 모세는 율법의 목표를 지적해야 할 때마다, 항상 같은 생각을 되풀이해서 그들에게 들려주었다. 율법의 교훈이 목적하는 것은 거룩한 생활로 사람을 하나님과 연결하며, 모세가 다른 곳에서 말했듯이, 사람이 하나님에게 부종하게(꼭 붙어 있게)하려는 것이다(참조, 신 11:22, 30:20).


그런데 저 성결을 완성하는 데는 이미 언급한 두 가지 제목이 있다. "너는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라"는 것과(신 6:5, 참조, 11:13), "이웃 사랑하기를 네 몸과 같이 하라"는 것이다(레 19:18, 참조, 마 22:37,39). 참으로, 첫째는 우리의 영혼이 전적으로 하나님께 대한 사랑으로 가득 충만하는 것이다. 여기서 이웃에 대한 사랑이 곧바로 흘러나올 것이다. 이 뜻을 밝히기 위해서 사도는 "경계의 목적은 청결한 마음과 선한 양심과 거짓이 없는 믿음으로 나는 사랑이거늘"고 가르친다(딤전 1:5). 양심과 진실한 믿음을 선두에 둔 것을 알 수 있지 않은가? 바꿔 말하면, 이것이 진정한 경건이며, 이 경건에서 사랑이 생겨나는 것이다.


그러므로 율법은 의를 훈련하기 시작하는 기초와 예비 단계를 가르칠 뿐이고, 사람을 진정한 목표인 선행으로 인도하지는 않는다고 믿는다면, 그것은 오해다. 모세와 바울의 발언들에 나타난 것보다 더 위대한 완전성은 바랄 수 없기 때문이다. 묻노니, 하나님을 경외하며, 영적인 경배를 드리며, 계명에 복종하며, 주의 바른 길을 걸으며, 끝으로 순결한 양심과 진지한 믿음과 사랑을 가지라고 하는 교훈으로 만족하려 하지 않는다면, 그런 사람은 어디로 가기를 원하는 것인가? 그러므로 율법의 계명들에서 경건과 사랑의 모든 의무를 찾으며 발견하는 해석은 확인된다. 율법이 하나님의 뜻을 절반만을 가르치지 않는 듯이 건조무미한 초보만을 따르는 사람들은 사도가 주장하는 것과 같은 율법의 목적을 전혀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52. 성경이 왜 가끔 둘째 판만을 말하는 것은 무슨 까닭인가?


그러나 그리스도와 사도들이 율법을 요약할 때에 때때로 첫째 판을 빼놓기 때문에, 그들의 발언을 두 판에 다 적용하는 사람들이 많다. 마태복음에서 그리스도께서는 "의와 인과 신"을 "율법의 더 중한 바"라고 부르신다(마 23 :23). 여기서 신은 사람에게 대한 신실을 의미하는 것이 분명하다고 나는 생각한다. 그러나 어떤 사람들은 하나님께 대한 신앙, 즉, 경건이라고 해석해서, 율법 전체에 적응한다.833)


확실히 이 해석은 어리석다. 그리스도께서는 사람이 자기의 의를 증명하는 행위를 말씀하시기 때문이다. 이 이유를 안다면, 다른 구절에서 영생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어떤 계명을 지켜야 하느냐고 묻는 청년에게 주께서 다만 다음과 같이 대답한 이유를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을 것이다. 즉, "살인하지 말라, 간음하지 말라, 도적질하지 말라, 거짓 증거하지 말라, 네부모를 공경하라,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마 19:18-19). 첫째 판에 대한 복종은 대개 심정의 의도로 하거나 의식에서 했기 때문이다. 심중의 의도는 밖에 나타나지 않으며, 위선자들은 항상 의식을 행하기에 분주하다. 그러나 사랑의 행위는 실지로 의를 우리 눈에 보여 준다.


예언자들도 이렇게 말하기 때문에 예언서에 매우 정통하지 않은 사람들도 이 점을 잘 안다. 선지자들이 회개를 권고할 때에는 대개 첫째 판을 생략하고, 신실과 정의와 긍휼과 공정을 촉구한다. 이렇게 함으로써 그들은 하나님께 대한 경외를 무시하는 것이 아니라, 진정한 두려움의 증거를 표적으로 보이라고 요구하는 것이다. 참으로 그들이 율법 준수를 논할 때에 대개 둘째 판을 역설한다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특히 둘째 판에서 의와 성실에 대한 열성을 볼 수 있기 때문이다. 내가 하는 말은 누구나 다 확인할 수 있으므로 구절들을 인용할 필요가 없다(예컨대, 사 1:17).


53. 믿음과 사랑


그러나 혹자는 "의의 본질은 하나님을 경건하게 공경하는 것보다 사람들과 결백하게 사는 데 있느냐?"고 물을 것이다. 절대로 그렇지 않다. 그러나 하나님을 진실로 경외하지 않고는 모든 점에서 사랑을 유지하기가 쉽지 않기 때문에, 사랑은 경건의 증거도 된다. 그뿐만 아니라, 주께서는 우리에게서 어떤 유익을 얻으실 수 없다는 것을 아시며, 또 선지자들을 통해서 그 점을 증언하시므로, 우리가 다할 의무를 자기에게 국한하시지 않고 우리가 이웃에 대해서 선행을 하도록 훈련하신다(참조, 시 15:2- 3). 그러므로 사도 바울이 성도의 완성은 사랑에 있다고 하는 것은 근거가 있다(엡 3:19, 1:5, 골 3 :14). 다른 곳에서 그는 사랑을 "율법의 완성"이라고 부르며(롬 13:10), "남을 사랑하는 자는 율법을 다 이루었느니라"고 첨가한다(롬 13:8). 또, "온 율법은 네 이웃 사랑하기를 네 몸같이 하라 하신 말씀에 이루었나니"고 한다(갈 5:14). 바울은 그리스도 자신이 가르치신 것을 가르칠 따름이다. 그리스도께서는 "무엇이든지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 이것이 율법이요 선지자니라"고 하신다(마 7:12). 율법과 선지자들이 믿음을, 또 하나님께 대한 합당한 경배에 속한 것을 첫 자리에 두고 사랑을 그보다 낮은 자리에 보내는 것은 확실하다. 그러나 주께서 말씀하시는 뜻은 사람에 대해 바르고 공정하게 행하라고 율법이 우리에게 명령하는 목적은, 만일 우리에게 하나님께 대한 경건한 두려움이 조금이라도 있다면 그것을 바르고 공정한 행위로 증거하는 훈련을 우리가 얻게 하려는 것뿐이라는 것이다.


54. 이웃에 대한 사랑


그러므로 우리가 확고하게 할 입장은 이것이다. 즉, 우리의 생활은 모든 점에서 형제들을 위한 결실이 가장 많을 때에, 하나님의 뜻과 율법의 계명에 가장 잘 합치하리라는 것이다. 자기 육신의 이익을 위해서 해야 할 일이나 해서는 안 될 일에 관해서는 율법 전체의 어디를 찾아보아도 한마디도 정한 것이 없다. 사람은 원래 너무도 이기적 경향이 강하게 태어났으므로 그리고 아무리 진리에서 벗어나더라도 이기심만은 여전히 가지고 있는 것이므로 이미 너무 많은 이기심을 조장하거나 자극할 법을 만들 필요는 없었다.834) 따라서 분명히 우리는 계명을 지키려면 자기를 사랑할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 이웃을 사랑해야 하며, 가장 착하고 거룩한 생활을 하려면 할 수 있는 대로 자신을 위해 애쓰지 말아야 한다. 자기만을 위해서 살며 노력하며 자기의 이익만을 생각하며 구하는 사람은 분명히 가장 비열하고 악한 생활을 하는 것이다.835)


참으로 주께서는 우리의 마음에 이웃을 사랑하려는 경향이 얼마나 깊이 박혀야 하는가를 표현하시기 위해서(레 19:18) 우리의 이기심으로 이웃에 대한 사랑을 측정하셨다. 이기심같이 강렬한 감정이 없기 때문이다. 우리는 이 표현법의 힘을 잘 생각해야 한다. 어떤 궤변가들이 미련하게 공상하듯이, 주께서는 이기심에836) 첫 자리를 주시며 사랑을 둘째 자리에 두시는 것이 아니라,837) 우리가 자신에 대해서 자연히 느끼는 감정을 다른 사람들에게 옮기시는 것이다. 따라서 사도는 "사랑은 자기의 유익을 구하지 않는다"고 한다(고전 13:5). 이 궤변가들이 쓰는 논법은 털끝만큼도 고려할 가치가 없다. 즉, 측정되는 것은 언제든지 측정하는 표준보다 낮다고 그들은 말한다. 참으로, 주께서는 우리의 이기심에 관한 표준을 정하시고, 타인에 대한 사랑을 거기 예속시키신 것이 아니라, 본성이 부패한 우리 안에 일반적으로 있는 사랑의 감정을 이제는 다른 사람에게 확대해야 된다는 것을 알리신다. 그렇게 함으로써 우리 자신의 유익을 구할 때에 못지않은 성의와 열심과 주의를 다해서 언제든지 이웃에게 유익을 주려는 자세를 가지라는 뜻이다.


55. 우리의 이웃은 누구인가?


그런데, 그리스도께서 사마리아 사람의 비유에서, "이웃"이라는 말에는 가장 인연이 먼 사람도 포함된다는 것을 알리셨으므로(눅 10:36), 우리는 사랑의 교훈을 인연이 가까운 사람들에 국한해서는 안 된다. 인연이 가까운 사람일수록 우리는 도와 줄 의무가 더욱 절실하다는 것을 나는 부정하지 않는다. 혈족 관계나 친분 관계나 이웃 관계가 긴밀할수록 책임도 더 많이 서로 분담하는 것이 인류의 공통한 습성이다. 이 점은 하나님의 뜻에 거스리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하나님의 섭리가 우리를 그렇게 되도록 인도하신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내가 주장하는 점은, 우리는 사랑이라는 한 감정으로 인류 전체를 예외 없이 포용해야 한다는 것이다. 여기에는 야만인과 문명인, 가치가 있는 사람과 없는 사람, 친구와 원수 등의 구별을 하지 말며, 사람을 사람으로만 볼 것이 아니라, 하나님 안에서 보아야 한다.838) 사람을 보는 법이 이와 다를 때에, 우리가 여러 가지 오류에 얽히게 되는 것은 당연하다. 그러므로 우리의 사랑이 향할 방향을 바르게 잡으려면, 먼저 사람을 보아서는 안 된다. 사람을 볼 때에는 사랑보다 미움이 생기는 때가 많을 것이다. 우리는 먼저 하나님을 보아야 한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자기에 대한 우리의 사랑을 모든 사람에게 확장하라고 명령하신다. 그래서 어떤 사람의 성격이 어떻든 간에, 우리는 하나님을 사랑하므로 그 사람도 사랑해야 한다는 것이 변하지 않는 원칙이 되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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