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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1년 5월 14일, 김기범과 김창식이 교역자 안수를 받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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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월 14일 “김기범과 김창식, 한국인 최초의 개신교 목사”

오늘은 우리나라 최초의 개신교 목사가 세워진 날입니다. 1901년 5월 14일 오후 2시, 김기범과 김창식은 서울 상동교회에서 열린 제17회 미국감리회 조선선교연회에서 안수를 받았습니다. 감리교는 언더우드와 아펜젤러가 내한한지 17년 만에 한국인 교역자를 세운 것입니다. 이들의 직함은 집사 목사였는데, 이는 성찬식 집례를 제외한 목회 제반 임무를 수행할 수 있는 직분이었습니다. 황해도 수안 출신인 김창식(金昌植, 1857-1929)은 31세에 미국 감리교 선교사 올링거(F. Ohlinger)의 집에서 사환으로 일하던 중 신앙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그는 홀(W. J. Hall)의 조사로 평양개척선교에 힘쓰다가 구속되는 중에도 순교자적 정신을 발휘한 것으로 유명합니다. 인천내리교회의 초대 교인으로 신앙생활을 시작한 김기범(金箕範, 1868.?-1920)은 영화학교를 설립하고, 우국충정(憂國衷情)의 정신으로 목회하며 국권회복을 위해 노력하였습니다.

감리교는 배재학당 안에 클래스(a class or school)를 두어 한국인 교역자를 육성했는데, 1894년에 가서 확실한 3명의 신학생을 확보할 수 있었다. 1894년, 아펜젤러는 배재학당 신학부의 개강을 상세히 보고했다. “클래스는 작년 겨울과 금년 봄에 다시 개강되었습니다. 교과과목은 올링거가 잘 번역한 의경문답(義徑問答) 공부와 창세기, 로마서도 가르쳤습니다. 겨울학기에 참석한 학생은 5명이었으나 불규칙했습니다. 봄에 출석한 이들도 5명이었으나 얼마 못 가서 3명으로 줄어들었습니다. 그러나 3명은 성실한 학생들이어서 앞날에 희망이 있습니다. 교역자를 양성하는 일은 하루아침에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우리에게는 유능한 권사와 전도인들이 몇 사람 있습니다. 전도자가 될 신학생들은 위의 세 사람뿐입니다.” “성실한 학생들” 3명은 평양의 김창식, 강화의 이명숙, 제물포의 김기범이었다.[박용규, 『한국기독교회사 2』 (서울: 생명의말씀사, 2004), 19.]

선교사들은 교역자 양성을 위해 신학용어를 정립하는 일에 힘써야 했습니다. 성화, 도덕, 양심, 구속, 경건, 속성, 관념, 허물 등의 용어들이 번역되고 정착되어야 기독교 교리를 가르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말 신학용어의 역사가 그리 길지 않다는 것과 이를 위해 신중에 신중을 거듭한 사람들이 있다는 것을 잊지 맙시다. 성경번역선교사들과 신학교수님들을 위해 기도합시다.

김창식은 계속 전도하면서 신학회에 들어가 정식 목회자 수업을 받은 후 1901년 우리나라 최초의 목사로 안수를 받았다. 그리고 1924년 정년 은퇴하기까지 영변, 수원, 해주 지방을 돌아다니며 125개의 교회를 개척하고 48군데 예배당을 건축하였다. 선교사들은 그런 그에게 ‘조선의 바울’이라는 명칭을 붙여 주었다. 그는 한곳에 머물러 장기 목회하는 스타일이 아니었다. 감리교 특유의 ‘순행’(巡行) 목회자였다. 열다섯 살에 집을 떠나 유랑생활을 하면서 얻은 길 지식이 목회에 도움이 된 것은 물론이다. 또한 어려서부터 몸에 익숙한 ‘밑바닥’ 생활 경험은 고행과 같은 농촌 목회에 큰 힘이 되었다. 머슴이었다가 한국 최초 목사가 되는 신분의 수직 상승을 경험하였지만 그는 마지막 순간까지 ‘낮은 자’의 겸손과 순종을 잃지 않았다.[이덕주, 『한국교회 처음 이야기』 (서울: 홍성사, 2006), 93-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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