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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9년 5월 24일, 겔슨 엥겔(Gelson Engel, 1864-1939, 한국이름 왕길지[王吉志]) 별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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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월 24일 “엥겔 선교사, 내가 잘못하였지요. 용서하여주세요.”

오늘은 겔슨 엥겔(Gelson Engel, 1864-1939, 한국이름 왕길지[王吉志])이 별세한 날입니다. 1939년 5월 24일, 38년 동안의 선교사 생활을 마치고 은퇴한 엥겔은 멜버른(Melbourne)에서 눈을 감았습니다. 그는 1900년에 아내와 세 아이와 함께 내한하여 경상남도 지방에서 선교하였고, 후에는 평양신학교 교수사역에 매진하였습니다. 엥겔의 우리말 이름은 “왕길지”입니다. 그의 이름인 ‘엥겔’과 비슷한 발음인 ‘왕길’에, 뜻 ‘지(志)’를 붙여 “최고로 좋은 뜻을 전한다”는 의미로 지어졌습니다. 언어에 대한 감각이 탁월했던 엥겔은 내한 후 27일 만에 우리말 축도를, 3-4개월 후에는 우리말 설교를 전할 수 있었습니다. 그는 평양신학교에서 성경원어를 가르쳤는데, 당시 수업의 교재는 영어로 된 것 뿐이었기 때문에 영어 강독이 가능한 이들만이 참가할 수 있었습니다. 이 수업에서 가르침을 받은 정암 박윤선은 엥겔에 대해 이렇게 회상했습니다.

왕길지 선교사는 호주에서 오신 분인데, 성경 원어 교수였다. 솔직하기로는 거의 수학적이었고, 책임감이 강하신 인격자였다. 나는 그에게서 히브리어와 헬라어를 배웠다. 그의 교수 방법은 매우 엄격하였으므로 그 덕에 원어학을 연구하는 학생들(약 10여명)이 많은 유익을 얻었다.[박윤선, 『성경과 나의 생애』 (서울: 영음사, 2000), 54.]

31년간 평양신학교에서 도서관장, 「신학지남」초대 편집인으로 봉사하며 가르쳤던 엥겔은 조선예수교장로회 제2회 총회장으로 섬겼으며, 성경개정작업과 찬송가 “내 주는 강한 성이요” 번역에도 힘썼습니다. 하지만 그의 위대함은 진솔한 인격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1929년 11월에 발생한 광주학생독립운동이 평양신학교에까지 영향을 미쳤을 때, 엥겔은 “목사 될 사람들이 무슨 시위냐?”라며 나무랐지만, 이내 잘못을 깨닫고 사죄하였습니다. 1913년에 총회장을 역임한 교계 지도자가 학생들에게 “내가 잘못하였지요. 용서하여주세요.”라고 사과하는 장면 속에서 그리스도인의 겸손을 발견하게 됩니다. 65세의 노인이라 할지라도, 말에 실수가 있었다면 용서를 구하는 것은 성경적이요, 상식적인 일입니다. 오늘날 한국사회와 교회에서는 책임을 시인하고, 잘못을 인정하며, 용서를 비는 일이 보기 드문 현상이 되어버린 것 같아 가슴이 아픕니다. 그리고 나부터 노(老)교수로부터 배우고, 성경을 통해 교훈 받아 실천할 것을 기도하며 다짐해 봅니다.

평양 장로회신학교에서 왕길지는 주로 성경언어인 히브리어, 헬라어 그리고 교회역사를 가르쳤다. 그 이유는 미북장로교 선교사들 중심으로 신학교가 운영되다 보니 성경을 비롯한 모든 신학과목은 그들에게 돌아갔고, 타교단 출신선교사들은 주변적인 과목을 맡아 가르치는 형편이었다. 그가 평양에 본격적으로 거주하는 1919년 이전까지는 일 년에 약 3개월 동안 부산에서 평양까지 왕래하면서 가르쳤다. 생각해 보라. 부산에서 평양 간 약 600-700 킬로미터가 되는 거리를 처음에는 도보나 말을 이용해서 이동했을 것이다. 하지만 1915년 철도가 개설되면서 상황은 좀 나아졌을 것이지만 많은 어려움이 선교지에 있었음을 상상할 수 있다. 또한 여러 나라의 선교사들과 함께 사역을 감당할 때 인간적인 갈등도 있었지만, 한결같은 마음으로 그가 신학교 사역을 할 수 있었던 것은 그의 성품을 반영해 준다고 할 수 있다.[조경현, 『초기 한국장로교 신학사상』 (서울: 그리심, 2011), 139-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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