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월 7일 “존 가우처, 선교로 이어진 기차 안에서의 만남”
오늘은 존 가우처(John Franklin Goucher, 1845-1922)가 태어난 날입니다. 1845년 6월 7일, 가우처는 펜실베이니아 웨인스보로(Waynesboro)에서 출생했습니다. 딕킨슨 대학에서 공부한 가우처는 1869년에 감리교 목회자가 되었습니다. 그는 볼티모어(Baltimore)에서 20년 이상 사역하면서, 175개의 미국 서부 지역 교회 개척을 지원했고, 일본과 중국, 인도의 교육 및 의료사업에 동참했습니다. 가우처는 1883년에 미국을 방문한 우리나라 친선 사절단을 만나게 됩니다. 민영익, 홍영식 등으로 구성된 이들은 고종이 1882년 5월에 미국과 수호통상조약을 맺은 후 파송한 외교사절단이었습니다. 가우처는 서방세계에 파견된 첫 외교사절단과의 대화를 통해 조선선교의 열정을 품게 되었습니다. 샌프란시스코에 도착한 후 시카고를 들러 워싱턴으로 가던 견미사절단과 가우처는 기차 안에서 만났는데, 이로 인해 조선선교가 진지하게 논의되기 시작한 것입니다.
미국에 간 사절단 일행이 샌프란시스코에서 대륙 횡단 기차를 타고 워싱턴을 향해 여행하던 중 ……콜로라도에서 한국 선교 사상 빼놓을 수 없는 중요한 인사 한 사람을 만나게 되었다. 그는 메릴랜드(Maryland) 주 볼티모어(Baltimore)에 있는 가우처대학의 설립자이며 미국 감리교회 목사로서 해외선교부의 출중한 지도자였던 가우처 박사였다. 3일 동안을 같이 여행하면서 가우처 박사는 한국에 깊은 관심을 갖게 되었다. 그는 한국 선교의 가능성을 내다보면서, 1833년 11월 감리교 외지 선교 본부에 한국에 선교 사역을 시작하는 것이 좋겠다는 편지와 함께 선교 자금 2천 달러를 송금하였다. 그러나 미국 감리교회는 아직 한국에 선교할 계획을 갖고 있지 않기 때문에 신통한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김인수, 『한국 기독교회의 역사 上』 (서울: 쿰란출판사, 2012), 145.]
조선선교에 대한 긍정적 답변을 늦지 못한 가우처는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3,000달러를 추가로 헌금했을 뿐 아니라, 자신의 친구 로버트 맥클레이에게 부탁하여 조선선교의 가능성을 조사해줄 것을 부탁했습니다. 가우처는 일본 주재 선교사 맥클레이 부부의 조선 방문을 위한 일체의 경비를 지원했습니다. 가우처의 부탁을 신적 소명으로 인식한 맥클레이는 1884년 6월에 조선에 도착하여 고종으로부터 의료와 교육사역에 대한 윤허를 얻어내는데 성공였습니다. 가우처는 6번에 걸쳐 조선을 방문하였고, 이화학당과 배재학당 및 조선기독교대학(연세대학교의 전신)을 재정적으로 지원하였습니다. 기차 안에서의 만남이 선교로 이어진 과정이 놀랍습니다. 하나님께서는 한 치의 어긋남도 없이 선교를 진행하셨고 지금도 하고 계십니다. 길이 막힐 때 하나님의 뜻 운운하며 쉽게 포기하지 맙시다. 주께서 당신을 통해 길을 만드실지 누가 알겠습니까?
당신은 한국을 여행해 그 나라를 답사하고 선교부를 설치할 만한 시간을 낼 수 있겠습니까? 그럴 수만 있다면 우리는 이교도 땅에 최초의 개신교 교회를 세우는 사람이 될 것입니다. 일본이 그 영예스러운 일을 맡아야만 한다는 것은 아주 적절한 것으로 돌리며 당신이 그 사역을 개시할 수 있다면 그것은 이미 당신이……지금껏 해온 봉사에 걸맞은 보탬이 될 것입니다.[박용규, 『한국기독교회사 1』 (서울: 생명의말씀사, 2004), 344. 가우처가 맥클레이에게 보낸 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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