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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2년 6월 11일, 헨리 아펜젤러(Henry Gerhard Appenzeller) 별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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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월 11일 “아펜젤러, 끝내 찾지 못한 시신”

오늘은 헨리 아펜젤러(Henry Gerhard Appenzeller)가 별세한 날입니다. 1902년 6월 11일 밤, 아펜젤러는 목포에서 열리는 성경번역위원회에 참석하기 위해 가던 중 순직하였습니다. 그가 탄 오사카 상선회사 소속 여객선 구마가와 마루는 제물포에서 출발하여 항해하던 중 군산 앞바다의 어청도 근해에서 같은 상선회사 배인 기소가와 마루와 추돌하고 말았습니다. 아펜젤러의 시신은 끝내 수습되지 못하였기에, 양화진 외국인 묘역에는 그의 기념비만이 세워져 있습니다.

한 생존자의 말에 따르면, 아펜젤러는 2등 객실 창구로 급히 뛰어가더라는 것이다……그는 그의 동행자들을 염려하여 마지막 숨을 거두는 그 순간에도 동행자들의 생명을 구하기 위해 애썼다고 볼 수 있다……우리는 그가 죽는 그 순간까지도 자신보다 한국인들을 구하기 위하여 더 애썼다는 사실을 확신한다. 바닷물이 그를 덮쳤다. 그리고 바닷물은 우리에게서 그의 무덤을 만드는 슬픔과 만족을 송두리째 빼앗아 갔던 것이다. 다만 우리는 대해(大海)의 짠 바닷물일망정 우리의 사랑하는 형제를 꼭 껴안아 주었으리라 확신하는 바이다. 그는 아무런 장신구도 없이, 그의 안식처는 아무런 표식도 비석도 없이 침울과 영멸의 바다 속에서 잠자고 있다. 그러나 그 바다는 가장 위대한 무덤이다. 가장 위대하고 가장 영원한 인간을 안장한 무덤이다. 우리는 그가 죽었다고 말한다. 그러나 그는 우리 마음속에 살아 있기 때문에 영원히 죽지 않을 것이다.[전택부, 『양화진 선교사 열전』 (서울: 홍성사, 2009), 92-93. 동료 존스(G. H. Jones) 목사의 증언.]

44세. 1885년 부활주일 오후에 제물포에 도착한 최초의 감리교 선교사 아펜젤러는 그렇게 생을 마감했습니다. 그는 1893년부터 성경번역위원으로 활동하였는데, 우리말 성경번역의 어려움을 파나마 운하 건설과 국가 간 철도 건설에 비교하였습니다. 아펜젤러를 비롯한 번역위원들의 노고로 마침내 1900년에 개정 우리말신약성경이 완성되어 정동교회에서 감사예배를 드리게 되었습니다. 정동교회는 아펜젤러에 의해 설립된 첫 번째 감리교회입니다. 선박침몰사고로 인한 아픔을 잊지 맙시다. 그때 복음위해 살다 간 아펜젤러도 기억될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아펜젤러는 누구에게나 좋은 벗이었다. 그가 한국인과 함께 있건 외국인과 함께 있건……그가 있는 곳에는 재미와 즐거움과 동지애가 있었다. 그가 세상에 있던 마지막 날 밤에도 그는 배 위에서 미국인 광산업자와 따뜻한 우정을 교환하였다……많은 사람들이 그의 온화한 웃음 때문에 그에게 끌려들었다. 열심히 일하고 약속을 지키고, 의무를 다하는 것들의 이 모든 것들이 그에게는 필수적인 것이었다. 그는 자신과 남을 그렇게 살도록 하였다. 그는……겁이 많다거나 멈칫거린다거나 잘못을 저지른다거나 게으른 것은 참지를 못하였다. 그러나 계명을 지키고 알찬 성과를 거두었을 때에는 그는 말로써 혹은 손을 내밀어서 각각의 경우에 맞게 격려나 감사나 칭찬이나 보답이나 즐거운 기분을 표시하였다. 그는 계산대에서나 부두에서나 거리에서나 사무실에서나 인간관계라는 기계에 명랑함의 기름을 침으로써 그것이 매끄럽게 돌아가도록 하였다. 이러한 것들은 광원(光源)에서 빛이 나오듯이, 혹은 그의 고향 펜실베이니아의 우물에서 물이 샘솟듯이 이 인간을 사랑하는 하나님의 종으로부터 자연스럽게 흘러나왔다.[이만열, 『아펜젤러』 (서울: 연세대학교출판부, 1985), 2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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