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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62년 6월 16일, 윌리엄 베어드(William M. Baird, 1862-1931, 한국이름 배위량[裵偉良]) 출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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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월 16일 “윌리엄 베어드, 유연한 태도”


오늘은 윌리엄 베어드(William M. Baird, 1862-1931, 한국이름 배위량[裵偉良])가 태어난 날입니다. 1862년 6월 16일, 베어드는 미국 인디애나 주 클라크 카운티(Clark Coumty)에서 출생했습니다. 하노버 대학(Hanover College)과 맥코믹 신학교(McCormick Seminary)에서 수학한 베어드는 학생자원운동의 영향으로 선교사역을 결심하게 됩니다. 그는 1891년에 미국 북장로교 선교사로 내한하여 4년간 부산에서 사역한 후 서울로 임지를 옮겨 교육 사업에 집중했습니다. 그는 1897년 10월에 평양 자택에서 숭실학당을 시작했고, 문서선교에 주력하면서 구약성경 개역작업에 힘썼습니다. 베어드는 장티푸스에 걸려 평양 숭실학교에 묻히기까지 40년간 한국교회를 섬겼습니다. 그의 아들 리처드 베어드(Richard H. Baird)은 아버지를 이렇게 평가했습니다.

다른 무엇보다도 베어드 박사는 믿음의 사람이었다. 그는 하나님이 그 손을 드셔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세상을 구원하신다는 것을 믿었고, 오늘날에도 그 목적을 이루시기 위해 항상 각 개인과 교회 안에서 역사하신다는 것을 믿었다. 그가 한국으로 가게 된 것도 바로 이런 믿음 때문이었다. 이런 믿음으로 인해 아버지는 당연히 선교활동으로 네비우스 방법을 받아들였던 것이다. 그리고 그 믿음으로 인해 북쪽에서 커다란 비약적인 발전의 중심에 계실 수 있었고, 그런 발전은……그분의 특징적인 자질들을 발휘토록 했다. 이 믿음으로 인해 한국인들을 신뢰할 수 있었고, 처음부터 그들을 책임 있는 영역에 둘 수 있었다. 아버지는 한국인에 대한 어떤 환상도 없었고, 어느 정도 설득력 있게 그들의 약점들을 열거할 수 있었다. 그러나 그런 약점은 인간 본성에 타고난 것들이고, 하나님께서는 인간들을 구원하시기 위해 역사하고 계시는 것이다. 이런 믿음 때문에 아버지는 무너지지 않고 온갖 실패와 좌절을 이겨내실 수 있었다.[Richard Baird, William M. Baird: A Profile by Richard H. Baird, 김인수 역, 『배위량 박사의 한국선교』 (서울: 쿰란출판사, 2004), 302.]

안정적으로 담임목회하며 선교사를 후원할 수 있었음에도 베어드는 청빙을 거절했습니다. 선교사로서의 자신의 부르심을 잊지 않은 것입니다. 그는 본래 중국 선교사로 예정되어 있었지만, 선교부가 조선 남부지방 개척을 요청하자 이 제안을 받아들였습니다. 베어드의 유연한 태도를 배웁시다. 나의 계획은 하나님의 섭리 하에서 언제든 변경될 수 있음을 인정하며 살아갑시다.

1888년 멕코믹 신학교를 졸업한 베어드는……미조리 주 오스세올라(Osceola)의 장로교회에 임시목회자로 가서 일하게 되었다. 그곳에서 일하던 중 해외선교사로 가는 것을 포기한다면 공식적으로 담임목사로 청빙하겠다고 제안했으나 베어드는 이를 거절하고, 콜로라도 주 델 노르테에 있는 더 작은 교회로 옮겨 갔다. 이곳에서 목회하면서 국내전도부(Home Mission Board)가 운영하는 멕시코인들과 스페인계 젊은이들을 위한 작은 기독교학교인 델 노르테 학교(Del Norte College)의 교장직을 겸하게 되었다. 비록 짧은 기간이라 할지라도 소수 민족 젊은이들을 위한 교육 경험이 후일 숭실학교 설립과 교육에 적지 않은 도움을 주었을 것이다.[이상규, “호주에서 온 제2진 선교사들”, 『부산의 첫 선교사들』 (서울: 한국장로교출판사, 2007), 269-7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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