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월 17일 “존 웨슬리, 한 책의 사람”
오늘은 존 웨슬리(John Wesley, 1703-1791)가 태어난 날입니다. 1703년 6월 17일, 존 웨슬리는 잉글랜드 링컨 주에 있는 엡웟(Epworth)에서 출생했습니다. 그는 19명의 자녀들 중에서 15번째 아이였습니다. 옥스퍼드 크라이스트처치 대학에서 수학한 웨슬리는 그 대학의 연구원이자, 영국국교회의 목회자로서 활동했습니다. 그는 신성클럽(Holy Club)의 설립자였고, 아메리카 식민지(조지아) 선교사였으나 아직 회심을 경험한 상태는 아니었습니다. 웨슬리는 올더스게이트 모임을 통해 회심을 체험한 후 본격적인 메서디스트(Methodist, 감리교) 운동을 전개해 나갔습니다. 영적 은사와 함께 행정력을 겸비하고 있었던 그는 탁월한 복음전도자로 쓰임 받았습니다.
웨슬리의 강조점은 그 자신이 ‘호모 유니우스 리브리’(home unius libri) - 책의 사람, 여기서 책은 성경을 의미한다 – 라는 사실에서 확인된다. “나는 날아가는 화살처럼, 삶을 통과해 지나가는 시간의 창조물이다. 나는 하나님으로부터 비롯된, 그래서 다시 하나님에게로 되돌아가는 영혼이다. 하나님은 은혜로우셔서 나에게 길을 가르쳐주신다. 그분은 그것을 책으로 기록해 놓으셨다. 아, 그 책을 나에게 주소서! 아무런 대가도 없이 하나님의 책을 나에게 주셨다! 난 그것을 가졌다. 여기에는 풍족한 지혜가 있다. 나를 ‘책의 사람’이 되게 하라. 이제 나는 인간의 분주한 길에서 멀리 벗어나 있다. 나는 홀로 앉아 있다. 오직 하나님만이 여기 계시다. 하나님의 현존 가운데 나는 그 분의 책을 열어 그 책을 읽는다.[Basil Miller, John Wesley, 김지홍 역, 『탁월한 영적지도자 존 웨슬리』 (서울: 기독신문사, 2000), 179.]
웨슬리는 칼빈주의자였던 휫필드와 예정교리 문제로 논쟁을 벌인 후 그와 결별하였습니다. 하지만 두 사람은 화해했고, 웨슬리는 휫필드의 장례식 설교를 담당하기까지 했습니다. 분명한 사실은 그의 교리적 입장이 모두 옳지 않다 하여도 - 이 세상 모든 신자와 마찬가지로 – 그는 명백하게 은혜의 교리를 전파했다는 것입니다. 오늘날 그의 후예(後裔)라고 주장하는 이들이 웨슬리의 설교와 태도에서 좀 더 배울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한 책의 사람”으로서 말 위에서도 연구하고, 폭도들 앞에서는 담대하며, 성도의 자격 기준에 대해서는 한 치의 양보도 없었던 웨슬리로부터 배웁시다. 그가 사랑했던 그 책을 나는 얼마나 탐독하며 묵상하고 있는지 돌아봅니다.
우리의 위대한 대장께서 주신 모든 진리의 무기 중에서 존 웨슬리가 사용하지 않은 것도 있을 것이다……그러나 이 모든 것에도 불구하고 그는 그리스도 편에 있는 담대한 용사요, 죄와 세상과 마귀와 싸운 두려움 없는 전사며, 어두운 시대에 타협하지 않고 주 예수 그리스도를 추종한 사람이었다. 그는 성경을 존중했다. 그는 죄를 약화시켰다. 그는 그리스도의 보혈에 대해 많이 말했다. 그는 거룩을 높였다. 그는 회개와 믿음과 회심의 절대적인 필요성에 대해 가르쳤다. 분명히 이 일들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우리 주님의 다음과 같은 말씀에는 분명히 깊은 교훈이 담겨 있다. “금하지 말라 내 이름을 의탁하여 능한 일을 행하고 즉시로 나를 비방할 자가 없느니라 우리를 반대하지 않는 자는 우리를 위하는 자니라”(막 9:39-40).[존 라일, 『휫필드와 웨슬리』, 배용덕 역 (서울: 부흥과개혁사, 2005), 140-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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