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월 27일 “키릴루스, 하나님의 어머니(Theotokos)”
오늘은 알렉산드리아의 키릴루스(Cyril of Alexandria)가 별세한 날입니다. 키릴루스는 444년 6월 27일에 사망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으며, 로마 가톨릭 및 콥틱 교회는 이 날을 그의 축일로 지키고 있습니다. 이집트의 작은 마을에서 태어난 키릴루스는 412년에 제24대 알렉산드리아 감독이 되었습니다. 그의 전임자인 삼촌 데오필루스(Theophilus)가 요한 크리소스톰을 추방한 것처럼, 키릴루스는 네스토리우스를 파문한 것으로 유명합니다. 콘스탄티노플 감독인 네스토리우스가 설교 중에 동정녀 마리아가 “하나님의 어머니”(Theotokos, God Bearer)라는 것을 부인하자 키릴루스는 반발했습니다. 그는 그리스도의 양성을 구분하면서도, 성육신을 통해 두 본성이 내적 통일을 이루었음을 강조하며 “하나님의 어머니”라는 용어 사용을 주장했습니다. 키릴루스의 신학적‧정치적 노력으로 네스토리우스는 431년 에베소 공의회에서 이단으로 정죄되었습니다.
그는 속성들 간의 상호 교류(a mutual communication)를 통하여 그리스도 안에서 두 본성이 하나가 되어 있다는 것을 강조하는 표현들을 사용함으로써, 그리스도의 인격이 결과로서 생겨난 단일한 인격인 듯이 말하기도 하였다. 그의 큰 기여는 네스토리우스주의에 대항하여 그리스도의 인격의 단일성을 강조하였다는 데에 있다. 그가 무엇보다도 강조하였던 세 가지는 당시의 보편적인 교리에 완전히 부합하는 것이었다: (a) 두 본성이 분리될 수 없게 결합되어 있다는 것; (b) 로고스가 자신의 도구로 사용한 인성의 무인격성(無人格性)과 의존성; (c) 그리스도 안에서 인격의 단일성과 연속성. 하지만, 그는 종종 나중에 등장하는 유티케스주의(즉, 단성론)적인 오류를 정당화하는 듯이 보이는 표현들을 사용하였다.[Louis Berkhof, The History of Christian Doctrines, 박문재 역, 『기독교 교리사』 (고양: 크리스챤다이제스트, 2008), 109-10.]
키릴루스에 대한 평가는 일치하지 않습니다. 그는 정통교리의 변호자임과 동시에 단성론자들에게 근거를 제공한 자로도 일컬어집니다. 키릴루스의 내면에는 자신의 대주교구인 알렉산드리아의 우월한 입지 확보를 위한 정치적 야욕과 성경적 기독론을 수호하려는 신앙심이 혼합되어 있었음을 부인할 수 없습니다. 나 역시 그와 별반 다르지 않은 연약한 피조물임을 인정합니다.
키릴루스와 네스토리우스 사이의 차이는 다음과 같이 요약될 수 있다. 네스토리우스는 “예수 「그리고」하나님이신 말씀”을 이야기하는 반면에, 키릴루스는 “예수는 말씀「이다」”라고 믿었다. 다시 말해서, 「누가」인간 예수였느냐에 있어서, 네스토리우스는 예수를 독특하고 완전한 방법으로 말씀과 연합된 한 사람으로 믿었고, 키릴루스는 예수는 성육신한 말씀「이다」라고 주장했다. 네스토리우스는 매우 분명하게 말했다. “나는 두세 달밖에 안 된 한 아이를 하나님이라 부를 수 없다.” 네스토리우스에 대한 키릴루스의 반대는 아리우스에 대한 아타나시우스의 반대처럼 구원의 교리에 대한 관심에서 시발되었다. 그는 성찬식에서 우리가 예수의 생명을 주시는 몸으로부터 생명을 받는다는 것을 믿었다(요 6:48-58). 그분의 몸은 생명을 주는데, 그 이유는 그것이 단순히 사람의 몸이 아닌 성육하신 말씀의 몸이기 때문이다.[Tony Lane, Christian Thought, 김응국 역, 『복음주의 입장에서 본 기독교 사상사』 (서울: 나침반, 1987), 99-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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