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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84년(혹은 1883/1885) 6월 29일, 우리나라 최초의 개신교회인 소래교회(松川敎會)가 설립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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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월 29일 “소래교회, 자생적 토착교회”

오늘은 소래교회(松川敎會)가 설립된 날입니다. 1884년(혹은 1883/1885) 6월 29일, 20여명의 신자들은 초가집에서 첫 예배를 드렸습니다. 소래교회는 우리나라 최초의 개신교회입니다. 또한 외국인 선교사가 들어오기 이전에 성경을 읽고 신앙을 가진 우리나라 사람들에 의해 자발적으로 시작된 신앙공동체라는 면에서 그 의미가 큽니다. 이는 세계 선교 역사 속에서도 보기 드문 경우입니다. 소래교회는 서상륜, 서경조 형제의 헌신 위에 세워졌습니다. 서상륜은 만주를 오가며 인삼을 팔던 중 열병에 걸려 사경을 헤매다가 선교사들의 치료로 회복된 후 세례를 받게 됩니다. 서상륜은 로스 선교사와 함께 신약성경을 번역한 후 국내로 반입하는 과정에서 많은 고초를 겼었습니다. 하지만 그는 동생 서경조와 함께 피곤을 모르는 열정으로 복음을 전했습니다.

서상륜은……솔내(松川)에 가서 가족들과 함께 정착하고 계속 복음을 전했다. 1884년 봄에는 로스가 선편으로 부친 성서 6천여 권을 받게 되었다. 이것은 당시 세관 고문이던 묄렌도르프의 예외적인 호의로 인수받았던 것이다. 그리고는 만주에서 돌아온 이성하(李盛夏)와 함께 다시 쉬지 않고 복음 전도행각을 계속했던 것이다. 그리고 바로 그 해에 우리 역사의 한 깃발이 휘날린다. 그 솔내에 우리 한국인들 손에 의해서 우리나라 최초로 교회당이 세워진 것이다. 백낙준 박사가 이 솔내를 가리켜서 “한국 프로테스탄트교회의 잊을 수 없는 요람”이라고 한 만큼, 솔내는 우리 교회 역사의 발상지요, 따라서 세계적인 주목을 끌었던 곳이다. 이 교회는 그 지방 사람들의 재정적 뒷받침만으로써 설립되고 운영되었으며, 불과 몇 해 안 되어서 이 마을 58세대 중에서 50세대가 기독교가 베푸는 구원의 도리에 입교하는, 감동의 대변화가 찾아왔던 것이다.[민경배, 『한국 기독교회사』 (서울: 연세대학교 출판부, 2007), 180.]

최초의 한국교회가 자생적 토착교회였다는 것은 큰 자랑거리입니다. 소래교회 설립은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이 반대 속에서도 변화를 일으킨다는 것을 증명하는 귀한 역사적 사례이기도 합니다. 제한받지 않고 역사하시는 하나님을 찬양합시다. 그러나 과도한 자긍심에 사로잡혀서는 안 됩니다. 소래교회가 세워질 때와는 비교할 수 없는 자유과 풍요로움 속에 살면서 하나님을 향한 간절함을 유지하는 것은 쉽지 않은 일입니다. 절제하고 근신(勤愼)하며 주님의 뜻을 받들기에 힘씁시다. 생명의 위협 속에서도 성경과 교회를 사랑했던 선배들의 정신을 배우고 전수합시다.

마을의 이름 첫 자는 ‘소나무 송(松)’이 변형된 것이었고 마을 곳곳에 맑은 샘물이 흐르다 하여 ‘내(泉)’ 즉 ‘래’라는 단어를 합성하여 ‘소래’라고 부르게 되었다. 다른 시각에서 보면 이 고장의 이름은 하나님께서 지어준 이름이다. 야소(耶蘇)가 온다는 의미로 야소의 약자 ‘소(蘇)’를 사용하고 야소가 왔다는 뜻으로 ‘올 래(來)’를 사용하여 결국 순수한 우리말로 소래라 불렀다. 서상륜 형제가 야소를 소개하기 위해서 왔던 지역이기에 이러한 의미에서 소래(蘇來)라고 말하는 것이다. 게다가 장연군에 있는 대구면(大救面) 안에 바로 소래가 있다. 대구(大救)는 큰 구원을 말한다. 이로써 그 누구도 부인할 수 없는 하나님의 섭리가 소래에서 이루어지게 되었다.[김수진, 『한국 기독교 선구자 서상륜』 (서울: 진흥, 2009), 11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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