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월 2일 “토머스 크랜머, 영국 개신교주의의 건축가”
오늘은 토머스 크랜머(Thomas Cranmer, 1489–1556)가 출생한 날입니다. 1489년 7월 2일, 크랜머는 잉글랜드 중부의 노팅엄셔(Nottinghamshire)의 애슬락튼(Aslockton)에서 태어났습니다. 그는 케임브리지에서 수학한 후 특별연구원으로 일하던 중 캔터베리 대주교로 임명되었습니다. 그로부터 2년 후 헨리 8세는 자신의 이혼 문제를 허락하지 않는 로마 가톨릭교회와 결별하고, 자신이 영국교회의 수장임을 선포했습니다. 크랜머는 영국 국교회를 개혁하는 일에 나섰습니다.
영국 개신교주의의 건축가는 헨리 왕의 캔터베리 대주교였던 토마스 크랜머였으며, 그의 개신교적 방향은 에드워드 치하에서 중요하게 나타났다. 성직자들의 결혼이 이제 넘쳐났다. 크랜머 자신은 1532년, 독일의 루터파 신학자 안드레아스 오시안더(Andreas Osiander)의 조카 마가렛 오시안더(Margaret Osiander)와 비밀리에 결혼했다. 이 결혼은 헨리가 대륙에 있던 크랜머를 캔터베리 대주교로 부르기 전에 이루어진 것으로, 대주교가 된 후 마가렛은 매우 신중하게 숨겨졌다. 전설에 따르면 크랜머가 그녀를 상자 안에 넣어서 영국으로 건너 왔다고 한다. 크랜머가 뉘른베르크(Nurenberg)로부터 영국으로 들여온 것은 “상자 속의 아내”만이 아니었다. 의심할 여지없이 이 루터파 도시에서, 그리고 오시안더와 대화하는 가운데, 크랜머는 개신교 사상들을 받아들였음에 틀림없다.[Carter Lindberg, The European Reformations, 조영천 역, 『유럽의 종교개혁』 (서울: 기독교문서선교회, 2012), 471.]
헨리 8세 치하에서 크랜머는 대성경(Great Bible) 발간 책임을 맡았고, 서문을 작성하기도 했습니다. 대성경은 최초로 공인된 영어성경으로서, 모든 영국 교회에 한 권씩 비치되었습니다. 또한 그는 에드워드 6세 치하에서 마틴 부처(Martin Bucer, 1491-1551)와 교제하며 종교개혁적 성향을 띤 기도서와 신앙고백서를 작성했습니다. 크랜머가 정치에 관여한 교역자이고, 한때 권력의 위협과 회유 앞에서 신앙을 철회했다는 사실을 함부로 평가하지 않기 원합니다. 복잡다단한 현실 속에서 최선으로 하나님과 그분의 교회를 섬기려는 분투가 나에게도 있는지 돌아봅니다.
에드워드 6세가 왕위에 오르자 크랜머는 본심을 드러냈다. 이제 그에게, 그리고 영국에, 참된 개혁을 위한 기회가 찾아온 것이다. 크랜머의 오랜 기다림은 드디어 끝이 났다. 크랜머는 먼저 예배와 설교를 겨냥하여 교회의 예배 개혁에 착수했다. 그는 교회의 전례를 위해 계획된 〈공동 기도서〉(Book of Common Prayer)를 개정하고 영국 전역의 강단에서 전해질 설교문을 교회력과 일치하도록 작성했다……다음으로 크랜머는 교회의 신학에 주목하여 일련의 조항으로 이루어진 새로운 신앙 고백서를 초안했다. 이 최초의 고백서는 42개 조항으로 이루어졌다. 그런데 크랜머가 이 조항들을 교회와 의회를 통해 통과시키려 할 때인 1553년에 에드워드가 눈을 감았다. 크랜머의 신앙 고백서는 유보되었다. 실제로 개혁을 위한 모든 노력이 수포로 돌아갔다. 그리고 메리 여왕 치하에서……영국은 다시 로마 교회의 지배를 받게 되었다.[Stephen J. Nichols, The Reformation, 이용중 역, 『세상을 바꾼 종교개혁 이야기』 (서울: 부흥과개혁사, 2009), 145-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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