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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86년 7월 3일, 봉경(鳳卿) 이원영(李源永, 1886~1958) 출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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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월 3일 “이원영, 하나님의 뜻 가운데서 오는 고난을 피해 달아나지 말아야 한다.”

오늘은 봉경(鳳卿) 이원영(李源永, 1886~1958)이 태어난 날입니다. 1886년 7월 3일, 이원영은 안동군 도산면 원촌동에서 출생했습니다. 그는 삼일 만세운동 주도로 인해 서대문 형무소에서 복역하던 중 예수님을 믿게 되었습니다. 퇴계의 14대손인 이원영이 세례를 받고 섬촌에 교회를 설립하자, 문중의 어른들이 몇 번씩 찾아와 공사를 방해했다고 합니다. 안동성경학교와 평양신학교에서 수학한 이원영은 안기교회에서 목회하던 중 체포되었습니다. 일제는 그에게 치안유지법 위반이라는 누명을 씌웠습니다. 이원영은 강제 사임하게 되었고, 목사직은 박탈되었습니다.

장로교회의 총회가 일제의 신사참배강요에 직면해 있던 때에, 이원영은 1937년 5월에 열린 제31회 경안노회 정기노회에서 총대들에게 우려가 섞인 권면을 했다……사흘 동안 매일 한 차례 이원영은 강단에서 구약성경 요나서를 한 장씩 봉독하고 설교했다. 그는 지금의 경안노회와 장로교회가 선지자 요나처럼 될까봐 염려하면서 말씀을 증거했다. 하나님의 명령을 잘 알면서도 그 뜻을 거슬러 "불순종한" 요나, "하나님의 낯을 피할 수 있는" 장소를 찾아 다시스로 도망친 요나, 자신의 죄로 말미암아 배가 풍랑에 휩싸여 부서지기 직전인데도 배 밑바닥에 누워 "달게 잠을 자는" 요나……이 설교를 통해서 그가 증언하고자 했던 바를 풀이해 보면, 첫째, 신사 참배 강요에 직면해 있는 조선의 교회는 하나님의 뜻이 어디에 있는지 잘 살펴야 하고, 둘째, 하나님의 뜻 가운데서 닥쳐오는 어려움과 고난은 어떠한 경우에도 그것을 피해 달아나지 말아야 하고, 셋째, 교회가 하나님의 낯을 피해 도망침으로 말미암아 이 민족 전체가 큰 풍랑을 만날까 염려된다는 요지였다고 본다. 결코 신사참배 강요에 굴복해서는 안 된다는 경고였다.[임희국, “봉경 이원영 목사와 신사참배 연구”, 『한국기독교역사연구소 소식』 제53호(2002), 4.]

이원영은 해방 전까지 4차에 걸쳐 검속되었습니다. 그는 순교하지 못하고 살아나온 것을 안타깝게 여겼던 어른이었습니다. 또한, 그는 신사참배를 거부한 사람들도 신앙의 교만이라는 죄를 지을 수 있음을 간파하였던 온건한 지도자였습니다. 감옥에서도 교역자의 자세를 견지하며 70여명에 이르는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고, 적은 양의 식사를 떼어 다른 죄수들과 나누었던 이원영 목사로부터 배우기 원합니다. 주여, 죄는 미워하되 죄인은 사랑하는 일에 둔한 저를 가르치소서.

1939년 5월, 이원영은 신사참배 반대자들에 대한 예비 검속 형태로 안동 경찰서에 약 석 달 동안 구금되었다. 형언할 수 없는 고문으로 그는 초죽음이 되었다. 이미 53세로 초로에 접어들었던 그는 고문 때문에 늑막염에 걸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제의 고문은 계속되었고 이제 그는 축 늘어져 버렸다. 그가 죽은 것으로 생각한 경찰은 그를 유치장 복도에 끌어내어 가마니를 덮고 가족들에게 시체를 가져가라고 통보했다. 가족들이 허둥지둥 달려와 그의 시체를 성소병원으로 옮기니 그의 목숨이 아직도 가느다랗게 붙어 있었다. 병원에서 20여 일 입원 가료하는 동안 그의 건강은 차츰 회복되었다. 그러나 병보석으로 잠시 풀려나 있는 기간도 감금 생활과 차이가 없었다. 행동반경은 거주지에서 2Km 이내로 제한되었다. 고등계 형사들이 그가 살고 있는 오복사골 골짜기 길목과 인근 산에 진을 치고 그의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했다.[양낙흥, 『한국장로교회사』 (서울: 생명의말씀사, 2008), 421-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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