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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76년 7월 11일, 윌리엄 블레어(William Newton Blair, 방위량[邦緯良]) 출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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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월 11일 “방위량, 아바지! 아바지!”

오늘은 윌리엄 블레어(William Newton Blair)가 태어난 날입니다. 1876년 7월 11일, 블레어는 미국 캔자스 주에 있는 샐리나(Salina)에서 출생했습니다. 웨슬리안 대학과 맥코믹 신학교에서 수학한 블레어는 1901년에 북장로교 선교부로부터 임명을 받았습니다. 내한선교사 블레어의 우리말 이름은 ‘방위량(邦緯良)’이었습니다. 선교에 대한 큰 꿈이 없었던 방위량은 안식년 기간 중 모교를 방문한 스왈른(William L. Suallen) 선교사의 도전을 받고 한국행을 결심하게 됩니다.

그가 한국에 선교사로 지망하게 된 동기는 좀 특별하였다. 1901년 평양 주재 선교사였던 소안론 선교사가 미국 시카고에 방문하였다. 그때 방위량은 신학교 4학년 학생으로서 졸업을 앞두고 있었는데, 어느 월요일 저녁 소안론은 학생들 앞에서 선교에 대한 특강을 하였을 때, 특별한 감흥은 없었지만 소안론 선교사가 그날 밤 자정 방위량 숙소에 찾아와 그에게 도전하길, “블레어, 한국에 가보지 않겠나?” 그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어 거절하였으나 한 가지 조건을 걸었다. 그것은 그의 인생의 반려자인 에디스가 허락하면 결심하겠다는 것이었다. 그런데 그녀는 방위량의 생각에 적극 동의해 주었고, 그 사건으로 결국 한국에 선교사로 내한하게 되었다.[조경현, 『초기 한국장로교 신학사상』 (서울: 그리심, 2011), 130-31.]

방위량은 평양 장로회신학교의 건축 기금 모금을 위해 봉사하였고, 평양대부흥의 현장을 기록으로 남기기도 했습니다. 그는 사위 한부선(Bruce F. Hunt)과 『한국의 오순절과 그 후의 박해』(The Korean Pentecost and the Sufferings Which Followed)를 공저했습니다. 그가 1907년 1월 12일, 장대현교회에서 고린도전서 12장 27절을 본문으로 ‘우리는 그리스도의 몸이요, 그의 한 지체’라는 제목의 설교를 전하자 성령의 역사가 나타나기 시작했습니다. 삼일 후, 선교사님을 미워했다며 눈물로 회개하는 성도 앞에서 방위량은 아무 말도 할 수 없었습니다. 그저 “아바지, 아바지”만 되뇔 뿐이었습니다. 독립운동을 지원하고 신사참배강요에 저항하다 1942년에 강제 추방당한 방위량은 해방 후 다시 내한하여 대구에서 사역하였고, 평양을 방문하기도 했습니다. 우리나라 나이로 70세. 40년의 사역이면 족할 것 같은데, 저 같으면 나를 추방한 나라 다시 안 돌아가고 싶을 것 같은데……. 그 열정이 부럽습니다. 그 마음을 움직이신 하나님이 놀랍습니다.

한 사람씩 한 사람씩 일어나서 자신의 죄를 고백하고 고꾸라져 울었다. 그러고 나서 바닥에 엎드려 죄인이라는 완전한 고통 속에서 주먹으로 바닥을 쳤다. 나의 요리사는 회개를 하려고 애쓰며 그 가운데 거꾸러져 방 건너 쪽에 있는 나에게 소리쳤다. “목사님, 나에게도 희망이 있는지, 용서받을 수 있는지 말씀해 주십시오.” 그러고 나서 바닥에 엎드려 울고 또 울며 거의 고통 중에 부르짖었다. 때때로 회개의 고백 후에 모든 회중이 통성기도를 했다. 수백 명의 회중이 통성기도를 한 효과는 무어라고 표현할 수 없는 것이었다. 다시 회개의 고백 후에 그들은 참을 수 없는 울음을 터트렸고 우리 모두 함께 울었다. 우리는 그럴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그 모임은 기도와 고백과 눈물로 새벽 2시까지 계속되었다.[Blair, The Korean Pentecost, 42. 박용규, 『한국기독교회사 1』 (서울: 생명의말씀사, 2004), 864에서 재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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