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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68년 7월 13일, 윌리엄 터너(William Turner, ca. 1508–1568) 별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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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월 13일 “윌리엄 터너, 로마 여우의 사냥과 발견”

오늘은 윌리엄 터너(William Turner, ca. 1508–1568)가 별세한 날입니다. 1568년 7월 13일, 뛰어난 식물학자이자 종교개혁가였던 터너는 런던에서 눈을 감았습니다. 그는 케임브리지에서 니콜라스 리들리, 휴 래티머 등과 교제하며 루터의 종교개혁사상을 받아들였습니다. 영국교회의 윤리적 부패를 비판하던 터너는 유럽으로 망명해야 했습니다. 그는 1543년에 바젤에서 『로마 여우의 사냥과 발견』(The Huntyng and Fynding Out of the Romish Fox)을 출판하였는데, 이는 로마 가톨릭 교회의 미사와 성인숭배 등의 미신적 요소를 비판한 소책자였습니다. 

터너는 상당한 기간 동안 감옥에 투옥되었다가 풀려난 후 외국으로 피난하게 되었고, 이태리로 가서 의학박사가 되었다. 터너는 헨리 8세의 재위 마지막 시기에는 독일에서 거주하였다. 에드워즈 6세가 즉위하자, 그는 영국으로 돌아왔고, 교회 개혁자들로부터 많은 존경을 받았다. 설교 인허를 받은 후 목회를 계속하였고 동시에 의술을 베풀었다. 그러나 메리 여왕이 등극하고 피비린내 나는 핍박이 시작되자 터너는 독일로 피하였다가, 로마로 옮겼고, 다시 스위스의 바실로 갔다. 메리 여왕이 죽고 엘리자베스 여왕이 등극하자 다시 고국으로 돌아왔다……터너는 성직자의 제복을 입는 것과 공동기도문 사용에 대해 매우 반대하였다. 결국 그의 이러한 청교도 입장으로 인하여 런던의 40여명의 목회자와 함께 정직되었다. 보통 토마스 카트라이트(Thomas Cartwright)를 감독제도와 미신적인 의식을 반대하여 교회에서 쫓겨난 첫 번째 인물로 말하고 있으나, 터너가 1563년에 이러한 처분을 받았음으로 그보다 먼저이다.[김홍만, 『청교도 열전』 (서울: 솔로몬, 2009), 72.]

터너의 묘비에는 그가 어떻게 교회와 영국의 적인 로마의 적그리스도들과 대항하여 싸웠는지 기록되어 있습니다. 우리는 터너의 책을 통해 청교도 교회 개혁운동의 시작을 찾아볼 수 있습니다. 영국 최초로 식물에 대한 독창적 저술을 남기기도 했던 터너는 살아있는 동안 큰 인정을 받지 못했습니다. 병마와 박해 등의 열악한 환경 속에서 연구하고 설교했던 터너를 잊지 맙시다. 상황이 감사를 앗아가지 못하게 합시다. 박수와 환호성이 없다 해도, 꾸준히 나의 길을 갑시다.

터너는 영어로 책을 쓰면서 자신이 알고 있는 지식을 최대한 많은 사람들에게 전파할 수 있기를 바랐다. 또한 이는 라틴어 경전과 찬송가를 사용하는 로마 가톨릭교회와 거리를 두는 방법이기도 했다. 터너는 영어로 설교를 하지 않는 사제란 영국 북쪽 국경 마을인 버릭의 성벽 위에 서 있는 파수꾼과 같다고 말했다. 스코틀랜드 군대가 언덕 위에서 밀고 내려오는 상황에서 베니운트 스코티(Veniunt Scotti, ‘스코틀랜드인들이 쳐들어온다’는 뜻)라고 아무리 라틴어로 소리쳐봤자 아무도 알아듣지 못한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좀 더 공정하고 평등한 사회를 위한 투쟁에 발맞춘 이 작업은 터너가 바라던 효과를 거두지 못했다. 당시 영국에 사는 300만 명의 사람들 가운데 글을 읽을 수 있는 이는 50만 명 정도에 불과했다. 그러나 일단 글을 읽을 수 있는 사람이라면 영어와 마찬가지로 라틴어도 쉽게 읽을 수 있었다. 또한 터너가 가장 중요한 역작을 영어로 썼기 때문에 영국을 벗어난 대륙에서는 독자를 전혀 확보할 수 없었다.[Anna Pavord, The Naming of Names, 구계원 역, 『2천년 식물 탐구의 역사』 (파주: 글항아리, 2011), 4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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