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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1년 7월 16일, 찰스 스터드(Charles Thomas Studd) 별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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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월 16일 “C. T. 스터드, 크리켓에 쏟았던 정열과 의지를 이제 그리스도께 드리겠다.”

오늘은 찰스 스터드(Charles Thomas Studd)가 별세한 날입니다. 1931년 7월 16일, C. T. 스터드는 벨기에령 콩고 아이밤비(Ibambi)에서 눈을 감았습니다. 천명 이상의 아프리카 사람들이 스터드의 장례식에 참석하였습니다. 탁월한 크리켓 선수로 명성을 날리며 케임브리지 트리니티(Trinity) 대학에서 수학하던 스터드는 우상과 같은 대접을 받았습니다. 하지만 그리스도인으로서는 허약하기 이를 데 없는 삶을 살았습니다. 무디의 집회에서 회심한 아버지의 열정 속에서도 변치 않던 스터드가 위독한 형 조지 스터드를 간호하면서 구령의 열정에 사로잡히게 됩니다.

“제일 놀랐던 점은 아프리카의 그리스도인들을 향한 그의 자세였습니다. 어느 주일 아침, 그들 중 500명 정도가 모였습니다……우리는 훌륭한 성도들의 모임을 기대하고 있었는데, 스터드는 죄가 만연해 있다고 말하면서 아무리 거듭났다 할지라도 죄가 있는 사람은 누구도 천국에 들어갈 수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두 손을 들어 하나씩 헤아리며 아마 이 500명 중에 10명 정도나 천국에 들어갈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이를 듣고 우리는 깜짝 놀랐습니다. 우리가 신학교에서 배우기는…사람이 한번 거듭나면…다시 거듭날 필요가 없습니다. 그는 이를 고려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완전히 거룩해지지 않고서는 누구도 주님을 만날 수 없다’는 것이었습니다.”[Ruth A. Tucker, From Jerusalem to Irian Jaya: A Biographical History of Christian Missions, 박해근 역, 『선교사 열전』 (고양: 크리스챤다이제스트, 1990), 349.]

“케임브리지 7인”의 한 사람이었던 스터드는 중국선교사, 미국과 영국의 학생학원운동 강사, 인도선교사로 사역하다가 건강문제로 귀국했습니다. 50세의 스터드는 의사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콩고선교를 위해 다시 짐을 꾸렸습니다. “식인종에게도 선교사가 필요하다.”는 문구가 그의 심장을 고동치게 했고, 스터드는 “아프리카의 마음 선교회”(Heart of Africa Mission)를 조직하였습니다. 이 기구는 WEC(Worldwide Evangelisation Crusade) 국제선교회의 전신이 되었고, 지금까지 수많은 선교사들이 스터드의 정신을 이어받고 있습니다. 스터드는 동료들과 화목하게 일하지 못했고, 가정에 충실한 아버지와 남편이 아니었으며, 신고하지 않은 모르핀 복용(치료목적)으로 면직되기까지 했습니다. 하지만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이시고 나를 위해 죽으셨다면, 그분을 위한 나의 어떠한 희생도 크다고 할 수 없다.”는 그의 고백은 진심이었습니다. 스터드의 약점을 인정합시다. 하지만 연약한 그릇을 통해 이루신 하나님의 일 전부를 매도하지는 맙시다.

그는 형이 깨어나지 않도록 방안을 반쯤 어둡게 한 후에 ‘이 세상이 정말 가치 있는지를’ 생각해 보았다. ‘매일 밤 삶과 죽음 사이를 배회하는 형을 침대 곁에서 바라볼 때 하나님은 내게 이 세상의 명예와 쾌락 그리고 어떤 가치가 있는지를 보여주셨다. 이러한 모든 것들이 형에게는 아무 도움이 되지 못했다. 형은 오직 성경과 그리스도께만 관심을 가졌다. 이러한 상황 가운데 하나님은 똑같은 교훈을 내게도 주셨다.’……조지가 병에서 완쾌되자마자 찰스는 성 팽크랑스에서 열린 무디 모임에 참석했다. ‘거기에서 주님은 나를 다시 만나주셨고, 구원의 기쁨을 나에게 되찾아 주셨다.’ 그는 즉시 ‘무엇이 가장 중요한지’ 알게 되었다……그는 자신의 결정을 친구에게 말하기 시작했다……크리켓에 쏟았던 정열과 의지를 이제 그리스도께 드리겠다는 것이다.[John, Pollock, The Cambridge Seven, (서울: 기독대학인회 출판부[ESP], 2009), 1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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