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기본카테고리

1674년 7월 17일, 아이작 왓츠(Isaac Watts, 1674–1748) 출생

반응형

7월 17일 “아이작 왓츠, 시와 찬미의 균형”

오늘은 아이작 왓츠(Isaac Watts, 1674–1748)가 태어난 날입니다. 1674년 7월 17일, 왓츠는 잉글랜드 사우스햄튼(Southampton)의 비국교도 가정에서 태어났습니다. 당시에는 성공회 신자들만 케임브리지(Cambridge)와 옥스퍼드에 들어갈 수 있었습니다. 비국교도를 위한 아카데미에서 수학한 왓츠는 독립파 회중교회에서 목회했습니다. 작은 눈에 150센티미터의 신장, 창백한 피부빛의 왓츠는 평생을 독신으로 살았습니다. 그가 저술한 논리학 교재와 교육 편람은 뉴잉글랜드와 영국 여러 대학에서 교재로 사용될 만큼 탁월한 것이었습니다. 무엇보다 그는 750여 편의 찬송시를 지은 것으로 유명합니다. 왓츠는 “영국 찬송가의 아버지”(Father of English Hymnology)로 불릴 만큼 깊이 있는 작품을 남겼습니다. 그가 지은 “주 달려 죽은 십자가”(When I survey the wondrous cross, 통일찬송가 147, 새찬송가 149)의 가사를 살펴봅시다.

1. 주 달려 죽은 십자가 우리가 생각할 때에 세상에 속한 욕심을 헛된 줄 알고 버리네
2. 죽으신 구주 밖에는 자랑을 말게 하소서 보혈의 공로 힘입어 교만한 맘을 버리네
3. 못 박힌 손발 보오니 큰 자비 나타내셨네 가시로 만든 면류관 우리를 위해 쓰셨네
4. 온 세상 만물 가져도 주 은혜 못 다 갚겠네 놀라운 사랑 받은 나 몸으로 제물 삼겠네
(Were the whole realm of nature mine, That were a present far too small;
Love so amazing, so divine, Demands my soul, my life, my all.)

왓츠는 아름다움을 알았던 성도였습니다. 그는 시편으로만 찬양하는 것에 만족할 수 없었습니다. 에베소서는 “찬미”로도 예배할 것을 명령하고 있기에, 그의 고백이 담긴 가사는 많은 이들을 하나님께로 이끌었습니다. 왓츠가 주장한 것은 시편찬송의 폐지가 아닌 시와 찬미의 균형이었습니다. 신학적으로 애매하고, 지나치게 주관적 고백의 찬미가 유행인 오늘날의 우리는 왓츠의 정신으로부터 배워야 하겠습니다. 찬양의 고백은 위기의 순간에 그리스도인들을 지켜줍니다. 그 고백이 시편과 성경말씀, 바른 신학을 담을 수 있도록 보다 많은 관심과 노력을 기울입시다.

왓츠가 편집하고 출판한 시편 찬송집은 많은 사람의 사랑을 받았다. 우리 한국 찬송가에는 무려 열네 편(7, 8, 41, 52, 58, 115, 138, 141, 147, 227, 237, 249, 387, 438)이 담겨 있다. 그의 시편집은 매우 널리 퍼져 있어서, 전투 중에 종이가 모자란 어떤 사령관은 교회당에 들어가서 그의 찬송집을 가져다가 포탄을 발사하면서, “왓츠를 보내 줘라!”라고 명령했다는 일화가 있을 정도였다. 왓츠는 시편 찬송가의 편집만이 아니라 직접 쓴 많은 찬송시를 남겼다. 18세기 이전까지 칼빈주의 교회들은 예배 시에 오직 시편 찬송만을 불렀다. 왓츠는 이를 폐지하지 않았지만, 여기에 영적인 노래들과 찬양을 더 첨가하였다. 에베소서 5:19에, “시와 찬미와 신령한 노래들로 서로 화답하며 너희의 마음으로 주께 노래하며 찬송하며”라는 말씀에 근거하여, 왓츠는 찬송 가사를 많이 작사한 것이다. 18세기는 복음송을 많이 만들던 부흥 운동의 시대였다.[김재성, 『개혁신학의 정수』 (서울: 이레서원, 2003), 484-85.]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