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월 3일 “김기엽(1925-1950), 단지 그리스도인이라는 이유 때문에”
오늘은 김기엽(1925-1950)이 별세한 날입니다. 1950년 8월 3일 새벽, 군복교회의 집사 김기엽은 공산군에 의해 죽임을 당했습니다. 김기엽은 기독교 가정에서 태어나 금산 심광학교에서 공부했습니다. 6·25 전쟁의 난리 속에서 피난을 거부했던 그는 결국 공산군의 손에 붙잡혔습니다.
김기엽 집사는 대한예수교장로회 군복교회의 창립초기 그 모체가 되었던 가정으로 선친 김황식 집사와 모친 김돌섬 집사의 장남으로 조모 김 권사님과 양친의 독실한 신앙의 가정에서 출생하였다. 성장하면서 그 당시 임구환 장로(초대 상공장관 임영신 여사의 선친)가 교장으로 역임하던 금산 심광학교에서 6년간 수학하여 졸업하게 된다. 이곳에서 기독정신과 교회의 인재양성에 관심을 품으며 본교회의 서리집사로 후진들을 복음으로 육성하고 교회봉사를 하며 섬기면서 주위사람들로 부터 그 장래를 촉망받으며 또한 부모님께도 효성이 극진한 아들로 더욱 칭찬을 받으며 단란한 가정을 이루고 가업에 충실하며 생활하였다. 그러다가 6.25동란을 맞게 되어 공산군의 핍박이 더욱 심하여 지게 되자 주위사람들로 부터 피난을 가라는 권유를 받게 되지만 김 집사는 모든 권유를 뿌리친 채 끝까지 공산군에 저항하다가 1950년 8월 1일 그들에게 붙잡혀 심한 고문을 당하였다. 1950년 8월 3일 새벽 3시경 우익인사 11명과 함께 사슬에 묶여 끌려가 군북면 산의 계곡에서 생매장 당하면서 대나무 창에 찔려 순교 당하였다.[http://kcmma.org/board/bbs/board.php?bo_table=bd1&wr_id=263&page=2 한국교회 순교자 기념 사업회 홈페이지, 2014년 7월 29일 접속].
만 25세가 되기 전에 순교한 김기엽은 널리 알려진 인물은 아닙니다. 하지만 성도라는 이유로 죽음의 잔을 마셔야 했던 이들은 결코 작지 않은 신앙을 소유했습니다. 격변의 시대를 맨 몸으로 부딪쳐 살아낸 그리스도인들이 있었음을 기억하며 오늘 하루도 치열하게 살 수 있기를 다짐해봅니다. 일제의 총칼보다, 같은 민족의 죽창으로 인해 더 많은 신앙인이 피 흘렸음을 생각할 때, 만감이 교차하는 것을 피할 수 없습니다. 이 땅에서 일어난 가슴 아픈 일들은 이제 우리가 짊어져야 할 몫입니다. 전쟁을 모르는 세대여, 화해와 용서, 통일을 위해 기도하고 있습니까?
6·25 전쟁으로 인명과 재산의 손실만 입었던 것은 아니다. 한국교회는 일제의 강점 하에 당했던 수난보다도 더 치욕적이고 무서운 박해와 피해를 입었다. 북한군의 서울 점령과 더불어 북한군에 편승하는 이들이 기승을 부렸다……UN군의 서울 탈환이 임박해지면서 상당수의 남한 교계 지도자들이 북한군에 의해 체포되었고 그들 대다수가 납북되어 지금까지 그들의 생사가 알려지지 않고 있다……수많은 교계 지도자들과 그리스도인들이 단지 그리스도인이라는 이유 때문에 순교 당했다. 이들 가운데는 숨어 있다 북한군에 의해 체포된 자들도 있었지만, 자기가 목회하던 교회를 버리고 피난을 떠나는 것이 양심에 걸려 끝까지 교회를 지키려다 공산군에 의해 살해당한 이들도 많았다.[박용규, 『한국기독교회사 1』 (서울: 생명의말씀사, 2004), 858-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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