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월 5일 (저녁의 묵상)
○ 제목: 여기 앉았고자 하느냐
○ 요절: "모세가 갓 자손과 르우벤 자손에게 이르되 너희 형제들은 싸우러 가거늘 너희는 여기 앉았고자 하느냐."(민 32:6)
친족들은 그들의 의무가 있습니다. 르우벤지파 사람들과 갓지파 사람들이, 만일 그들이 정복했던 땅을 자기들의 것으로 주장하고, 나머지 지파 사람들이 그들의 몫을 위해서 싸우는 것을 그들에게만 맡겼더라면, 매우 우애가 없었을 것입니다(즉, 친족으로서 매우 무정한 일이었을 것입니다).
우리는 과거에 살았던 성도들의 노력과 고통에 의하여 많은 것을 물려받았습니다. 만일 우리가 우리의 최선의 에너지를 교회에 드림으로써 교회에 어떤 보답을 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교회의 성도의 반열에 들어가기에 합당치 않습니다.
다른 성도들은 시대의 오류(그릇된 시대사조)에 대하여 용감하게 싸우고 있거나, 타락의 파멸 가운데서 멸망해가는 사람들을 발굴(구출)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만일 우리가 게으름에서 수수방관한다면, 우리는 "여호와를 도우러 오지 않았던" 메로스의 저주가 우리에게 내려오지 않도록 주의해야 합니다(참고 삿 5:23).
포도원의 주인이 "너희는 어찌하여 종일토록 놀고 여기 섰느뇨?"라고 물었습니다(마 20:7). 만일 우리가 게으름 속에 앉아 있다면 헌신적인 선교사들과 열심있는 목회자들의 수고는 우리를 부끄럽게 할 것입니다. 시련을 회피하는 것은 시온에서 편하게 지내는 사람들에게 오는 시험(temptation) 입니다.
그들은 십자가는 기꺼이 피하지만 면류관은 더욱 쓰고 싶어합니다. 만일 가장 귀중한 것들이 불속에서 연단된다면, 우리가 도가니(가혹한 시련)를 피할 수 있겠습니까?
다이아몬드가 선반(旋盤, the wheel) 위에서 다듬어져야 한다면 우리도 고통없이 온전하게 될 수 있겠습니까?
그렇다면 우리가 왜 우리 주님보다 더 나은 대접을 받아야 합니까? 맏아들이 매를 맺으셨는데 그 동생 형제들은 왜 아니겠습니까?
비겁하게도 자만은 십자가의 군사가 되기보다 오리털 베개와 비단의자를 선택합니다.
하나님의 뜻에 따르는 사람은 은혜로 그것을 기뻐하게 되는 것을 배울 것입니다.
Evening
"Shall your brethren go to war, and shall ye sit here?"
Numbers 32:6
Kindred has its obligations. The Reubenites and Gadites would have been unbrotherly if they had claimed the land which had been conquered, and had left the rest of the people to fight for their portions alone. We have received much by means of the efforts and sufferings of the saints in years gone by, and if we do not make some return to the church of Christ by giving her our best energies, we are unworthy to be enrolled in her ranks. Others are combating the errors of the age manfully, or excavating perishing ones from amid the ruins of the fall, and if we fold our hands in idleness we had need be warned, lest the curse of Meroz fall upon us. The Master of the vineyard saith, "Why stand ye here all the day idle?" What is the idler's excuse? Personal service of Jesus becomes all the more the duty of all because it is cheerfully and abundantly rendered by some. The toils of devoted missionaries and fervent ministers shame us if we sit still in indolence. Shrinking from trial is the temptation of those who are at ease in Zion: they would fain escape the cross and yet wear the crown; to them the question for this evening's meditation is very applicable. If the most precious are tried in the fire, are we to escape the crucible? If the diamond must be vexed upon the wheel, are we to be made perfect without suffering? Who hath commanded the wind to cease from blowing because our bark is on the deep? Why and wherefore should we be treated better than our Lord? The firstborn felt the rod, and why not the younger brethren? It is a cowardly pride which would choose a downy pillow and a silken couch for a soldier of the cross. Wiser far is he who, being first resigned to the divine will, groweth by the energy of grace to be pleased with it, and so learns to gather lilies at the cross foot, and, like Samson, to find honey in the lion.
'기본카테고리' 카테고리의 다른 글
사사기 19:1-9 (2015년 8월 5일 수요 설교) (0) | 2018.08.05 |
---|---|
2018년 8월 5일 주보 (0) | 2018.08.05 |
8월 5일 스펄전 아침묵상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로마서 8:28] (0) | 2018.08.05 |
사사기 19장 (새번역/개역개정, 자비교회 성경통독) (0) | 2018.08.05 |
8월 5일 맥체인식 성경읽기 [사사기 19장, 사도행전 23장, 예레미야 33장, 시편 3-4편] 새번역 August 5 Robert Murray McCheyne daily bible reading (0) | 2018.08.0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