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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5년 8월 6일, 존 로스(John Ross, 1842-1915, 羅約翰) 별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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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월 6일 “존 로스, 인자한 모습이 눈앞에 아른거리는데, 지금도 그분은 우리를 격려하십니다.”

오늘은 존 로스(John Ross, 1842-1915, 羅約翰)가 별세한 날입니다. 1915년 8월 6일, 로스는 에든버러에서 눈을 감았습니다. 1910년 선교사직에서 은퇴한 로스는 영국으로 돌아가 메이필드(Mayfield) 교회에서 장로로 봉사하다가 주님 품에 안겼습니다. 그는 1860년에 에든버러 연합장로교신학교를 졸업한 후 선교사역을 위해 중국에 도착한지 7개월 만에 아내와 사별하였습니다. 1874년 10월, 만주 통화현에 있는 고려문에서 평북 의주 출신 이응찬을 만나 그로부터 우리말을 배운 로스는 1877년에 조선어 교재(Corean Primer)를 발행했고, 1882년에는 최초의 한글 성경인 “예수성교 누가복음 젼서”를 번역하는데 성공했습니다. 로스는 중국 동북지방에서 사역을 지속하였는데, 그의 사망 소식을 들은 동관교회 교인들은 그를 위한 기념비를 세웠습니다.

위대한 목자이신 John Ross 박사는 인자하며 주님께 충성하여 형제들을 사랑하였습니다. 그분은 하나님의 말씀을 전파하기 위해 조국 영국을 떠나 중국에 와서 심양과 요양에서 헌신함으로 주님의 복음을 선포하였습니다. 어려움을 무릅쓰고 단신으로 사방을 다니며 만주 지역에 열심히 복음의 씨앗을 뿌리며 오래 참음으로 우리를 구원에 이르도록 인도하셨습니다. 그분은 수많은 교회를 세우고 복음을 힘써 전파하며 70세까지 선교를 하시다가 아름다운 헌신의 발자국을 중국에 남기셨습니다. 그리고 세상에서 하나님의 일을 하셨으니 지금 하늘나라에서 천국의 기쁨을 누리고 있습니다. 훌륭한 믿음을 지니셨던 그분은 후대에게 아름다운 본보기를 남기셨습니다. 우리는 John Ross 박사님을 그리워하며 여기에 기념의 글을 아로새겨 성도들의 그리워하는 마음을 대신합니다. 인자하신 모습이 아직도 눈앞에 아른거리는데, 떠나는 지금도 그분은 우리를 격려하고 계십니다. 비문의 글로 우리의 존경하는 마음을 대신합니다. 1916년 5월 동북삼성 각 교회 장로들은 존경하는 마음을 가득 담아 이 비(碑)를 세웁니다.[김수진, 『한국 기독교 선구자 서상륜』 (서울: 진흥, 2009), 106.]

추모비에 적힌 글과 시를 읽어내려가다보면 가슴이 먹먹해집니다. 목자를 떠나보낸 중국 성도들의 진심이 마음으로 전해지기 때문일 것입니다. 조선의 쇄국정책으로 내한의 길이 막힌 상황에서도, 성경을 우리말로 번역하여 복음을 접할 수 있게 해 주었던 사람, 로스를 기억합시다. 그의 하나님이 그를 인내하게 하셨고, 그에게 양들을 맡기셨습니다. 아무리 어두운 일이 있다 하여도 내게 맡겨진 그 일에 최선을 다 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끝까지 인내하도록 도와주소서.

1892년 조지 길모어(George W. Gilmore)는 자신의 서울에서 본 한국(Korea From Its Capital)에서 “한국개신교 복음화의 시작은 중국 우장에서 활동하는 존 로스 목사의 노력에 기인한다”고 지적할 만큼 존 로스는 한국개신교 선교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존 로스는 제임스 그레이슨(J. H. Grayson)이 “한국의 첫 선교사”라고 부를 만큼 알렌, 언더우드, 아펜젤러 입국 이전에 한국선교의 초석을 놓았던 개신교 선교사였다……1887년에는 예수셩교젼셔 즉, 신약 전권이 완간되었다. 언더우드와 아펜젤러가 성경 번역을 위해서 공식적인 모임을 시작한 것이 1887년이었음을 생각할 때, 이미 존 로스의 신약성경이 완간되었다는 것은 대단히 앞선 일이었다.[박용규, 『한국기독교회사 1』 (서울: 생명의말씀사, 2004), 292, 3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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