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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36년 8월 10일, 카스파르 올레비아누스(Caspar Olevian[Kaspar Olevianus], 1536–1587) 출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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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월 10일 “카스파르 올레비아누스,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쌍무적인(bilateral) 다짐”

오늘은 카스파르 올레비아누스(Caspar Olevian[Kaspar Olevianus], 1536–1587)가 태어난 날입니다. 1536년 8월 10일, 올레비아누스는 모젤 강가의 도시 트리에르(Trier)에서 출생했습니다. 그의 아버지는 제빵사이자 시의회의 의원이었습니다. 파리에서 개신교 신앙을 가지게 된 올레비아누스는 성경과 칼빈의 가르침으로 무장했고, 우르시누스와 함께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 작성에 공헌했을 뿐만 아니라『팔츠의 교회법』를 작성하기도 하였습니다. 프리드리히 3세가 죽은 이후 올레비아누스는 베를레부르크(Berleburg)에서 목회하였고, 이후 헤르보른(Herborn) 신학교에서 교의학을 가르치며 후진을 양성했습니다. 그의 교과서는 칼빈의 『기독교강요』였습니다.

그는 종교개혁으로 약동하는 프랑스를 보게 되었다. 거의 모든 도시마다 신교도들이 있었다. 공개적으로 예배드릴 수 없던 신교도들은 비밀 장소에서 모임을 가졌고 자신들을 보호하기 위해 암호를 사용하고 보초를 세웠다. 그들은 성경과 함께 자신들처럼 프랑스인인 존 칼빈과 같은 지도자들의 글을 열심히 공부했고, 고문이나 화형·교수형의 죽음도 두려워하지 않았다. 올레비아누스는 곧 이 용감한 사람들과 하나가 되었고, 프랑스에서 6년을 머무는 동안에 열성적인 신교도가 되었다. 그는 부르주의 강에서 익사를 면하고 구출되었을 때 서약을 했는데……법률가 대신 설교자가 되겠다는 것이었다. 21세가 되던 이듬해에 그는 박사 학위를 받았다. 트리에르의 집에 들른 뒤에 그는 제네바와 취리히를 향해 떠났는데 그곳에는 위대한 개혁자들이 살고 있었다.[Thea B. Van Halsema, Three Men Came to Heidelberg and Glorious Heretic: The Story of Guido de Bres, 강변교회 청소년학교 도서위원회 역, 『하이델베르크에 온 세 사람과 귀도 드 브레』 (서울: 성약, 2006), 22-23.]

올레비아누스는 개혁파 언약신약 정립에 공헌한 설교자였습니다. 예정과 언약의 연결에 대한 그의 접근이 넓기 때문에 아직까지 일치된 평가가 나오지 않았지만, 언약백성답게 믿음을 지키고 순종해야 한다는 그의 주장은 한국교회가 귀 기울여 들어야할 것입니다. 창세기 15장에서 쪼갠 고기 사이를 홀로 지나신 하나님께서 교회의 반응을 원하고 계십니다. 주께서 홀로 이루신 구원을 선물로 받은 신자는 행동합니다. 십계명을 준행하며 언약백성다운 면모를 보이는 것입니다.

올레비아누스는 은혜 언약을 아주 넓은 의미에서 해석하였다. 그는 이것을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입증된 하나님의 일방적인(unilateral) 화해로만 이해되지 않고,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쌍무적인(bilateral) 다짐을 의미하는 것으로 보았다……따라서 언약의 조건을 말하기를 주저하지 않는다……올레비아누스의 언약 신학에서 그리스도와의 연합은 가장 돋보이는 부분이다……이를 처음 주장한 칼빈보다도 우르시누스가 더 잘 활용했고, 올레비아누스가 언약 신학에 가장 훌륭하게 접목시켰다. 그리스도와의 신비로운 연합이라는 개념은 매우 긴장감이 넘치며, 역동적인 해설을 제공한다.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실제 화해로써 언약을 좀 더 폭넓게 해석하는 올레비아누스는 우리의 믿음과 하나님의 약속, 양쪽이 언약에서 서로 연결된다고 보았다.[김재성, 『개혁신학의 정수』 (서울: 이레서원, 2003), 213-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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