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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가 스스로 이르기를 내가 다윗을 벽에 박으리라 하고 사울이 그 창을 던졌으나 다윗이 그의 앞에서 두 번 피하였더라” (사무엘상 18:11)
다윗은 사울의 은인입니다. 사울이 블레셋과의 전투에서 고전하고 있을 때, 다윗이 골리앗을 해치워 주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스라엘은 블레셋을 패퇴(敗退)시킬 수 있었습니다. 물론 다윗이 골리앗을 이길 수 있었던 것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도우심 때문이었습니다. 군대를 이끄는 총지휘관이었던 사울 왕은 이 일로 다윗에게 큰 빚을 진 셈입니다. 그렇다면 그를 아껴주는 것이 당연한 일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사울은 그만 시기와 질투에 빠지고 맙니다. 사소한 일 때문에 말이죠.
“여인들이 뛰놀며 노래하여 이르되 사울이 죽인 자는 천천이요 다윗은 만만이로다 한지라” (사무엘상 18:7)
개선하는 군대를 환영하며 부르던 이 노래 소절이 사울을 노하게 만들었습니다. 사실 불쾌할 이유가 없지 않습니까? 여인들은 사울을 자극하려는 동기가 없었습니다. 그저 팩트를 노래한 것 아닙니까? 자칫 잘못하면 블레셋의 속국이 될 뻔한 위기에서 건짐 받은 것을 기뻐하는 노래였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과 그의 말씀에서 떠난 사울은 이 모든 것을 왜곡하여 받아들이고, 그릇되게 반응합니다.
“사울의 딸 메랍을 다윗에게 줄 시기에 므홀랏 사람 아드리엘에게 아내로 주었더라” (사무엘상 18:19)
사울은 자신을 위해 음악 치료로 봉사하는 다윗을 죽이려고 했습니다. 게다가 약속을 어기면서 다윗을 농간하였습니다. 큰딸 메랍을 아내로 준다고 했다가 말을 바꾸어 다른 사람과 결혼시켜 버린 것입니다. 다윗의 마음이 어떠했을까요? 너무나 의아하고 황당하며, 억울하지 않았을까요? “내가 왕에게 혹시 잘못을 저지른 게 있지 않나?”, “왜 왕은 수금 연주를 하는 나에게 창을 던졌을까? 실수가 아닐 거야. 두 번이나 그랬는걸.”, “나를 천부장으로 임명해 준 것은 고마운 일이다. 하지만 왜 사위로 삼으려는 뜻을 바꾸셨을까? 내가 가난하고 미천하기 때문일까?” 다윗은 이 모든 의구심을 뒤로 합니다. 그리고 불평하거나 대항하지 않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주의깊게 성경을 해석해야 합니다. “다윗 정말 대단하다. 나도 다윗 같은 사람이 되고 싶다.”가 결론의 전부가 되어 버리면 성경해석에 있어 큰 오류를 범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본문은 3번이나 다윗이 견딜 수 있었던 원동력이 무엇인지 알려줍니다.
“여호와께서 사울을 떠나 다윗과 함께 계시므로” (사무엘상 18:12)
“다윗이 그의 모든 일을 지혜롭게 행하니라 여호와께서 그와 함께 계시니라” (사무엘상 18:14)
“여호와께서 다윗과 함께 계심을 사울이 보고 알았고” (사무엘상 18:28)
임마누엘! 함께 하시는 하나님 까닭에 다윗은 이 모든 시련을 이겨낼 수 있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신뢰하는 사람은 누구든 이 임마누엘을 소유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이 “임마누엘”을 주시기 위해 다윗보다 더한 고난을 겪으셨습니다. 다윗은 창을 피했지만, 예수님은 채찍에 맞으셨고, 창에 찔리셨습니다. 다윗은 왕이자 장인인 사울에게 버림받았지만,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성부 하나님으로부터 외면당하셨습니다. 다윗은 골리앗과 블레셋 사람 이백 명을 제압했지만, 예수님은 마귀의 일을 멸하셨습니다. 본문을 통해 고난 받으신 예수님, 온전한 왕 되신 예수님을 바라보십시오. 모든 죄를 용서하실 수 있는 그분을 붙잡으십시오. “임마누엘”을 선물로 주실 것입니다. 영원히 당신과 함께 해 주실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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