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월 24일 “찰스 시미언. 반기를 든 교인들을 목양하며 54년간 자기의 자리를 지켰던 사람”
오늘은 찰스 시미언(Charles Simeon, 1759–1836)이 태어난 날입니다. 1759년 9월 24일, 찰스 시미언은 잉글랜드의 버크셔 레딩(Reading, Berkshire)에서 태어났습니다. 시미언은 케임브리지 대학교 킹스 칼리지에 입학한 해에 고난주간 성찬식을 계기로 회심했습니다. 그의 나이 19세 때의 일이었습니다. 졸업 후 케임브리지 삼위일체 교회의 목회자로 임명받은 시미언은 죽을 때까지 54년간 한 강단을 지켰습니다. 그는 선교에 큰 관심을 가졌던 설교자였습니다. 그의 영향으로 많은 사람들이 복음을 들고 동양으로 향하는 배에 올랐습니다. 힌디어와 페르시아어로 성경을 번역한 위대한 선교사 헨리 마틴(Henry Martyn)은 찰스 시미언의 영적 아들이었습니다.
아마 19세기 전반기에 케임브리지에서 가장 사랑을 받으면서도 가장 미움을 받은 사람은 1782년에서 1836년까지 트리니티 교회의 교구 목사를 지낸 찰스 시므온(Charles Simeon)일 것이다. 그는 타협할 줄 모르는 복음주의자이며 그를 놀리려고 교회에 오곤 했던 기지 넘치는 젊은 대학생들에게 언제라도 기쁨을 선사하는 사람이었다. 그러나 다른 사람들은 사도적 복음에 대한 그의 두려움 없고 균형 잡힌 설교를 높이 샀기 때문에 그의 교회에 왔다. 그곳에는 오랜 활동 내내 언제나 이 지혜로운 믿음의 옹호자에게 지도와 도움을 구하며 그를 바라본 기독학생들 곧 ‘시므온파’가 상당히 있었다.[Five Pioneer Missionaries: David Brainerd, William C. Burns, John Eliot, Henry Martyn, John G. Paton, 김기찬 역, 『5인의 개척 선교사』 (서울: 크리스챤다이제스트, 1994), 246-47.]
시미언은 자신의 복음적 설교를 좋아하지 않는 교구민들 까닭에 오랜 시간 고난을 감내해야 했습니다. 학생들과 회중들의 조롱과 비타협적 태도 속에서 시미언은 자신의 자리를 지켰습니다. 새벽 4시면 일어나 첫 4시간을 성경연구와 기도로 보낸 것이 그의 인내의 비결 중 하나였을 것입니다. 퇴사와 이직만이 능사는 아닙니다.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의 승인 없이 섣불리 움직이지 않는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전방위로 인내가 필요한 때입니다. 주여, 끝까지 견디게 하옵소서.
교인들이 시미언에 반대하여 첫 번째로 한 일은 그에게 주일 오후 설교를 맡기지 않는 것이었다. 주일 오후 예배는 교인들이 관장하고 있던 것이다. 교인들은 5년간 주일 오후 설교를 해먼드에게 맡겼다. 그리고는 해먼드가 다른 곳으로 떠나자 그 자리를……그와는 무관한 또 다른 사람에게 다시 7년간 맡겼다! 1794년에 이르러서야 마침내 시미언은 주일 오후 설교자로 선택되었다. 이렇게 12년 동안 시미언은……그의 지도력에 반기를 든 교인들을 목양했다. 시미언은 주일 저녁 예배를 신설하려는 시도도 해 보았다. 많은 마을 사람들이 예배를 드리기 위해 왔다. 그러나 사람들이 길거리에서 기다리며 서 있는데도 교구 위원들은 교회 문에 자물쇠를 채워 놓았다. 한번은 시미언이 자물쇠 제조업자를 동원해 교회 문을 열었다. 그러나 그런 일이 또 발생하자 결국 시미언은 교인들에게 굴복하고 저녁 예배를 중단했다.[John Piper, The Roots of Endurance, 이용중 역, 『인내의 영웅들』 (서울: 부흥과개혁사, 2008), 112-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