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월 5일 “벤자민 워필드, 학문과 경건이 적대적이라면, 신학 자체가 저주일 것이다.”
오늘은 벤자민 브레켄리지 워필드(Benjamin Breckinridge Warfield, 1851–1921)가 태어난 날입니다. 1851년 11월 5일, 워필드는 미국 켄터키 주 렉싱턴(Lexington) 부근에서 영국 청교도의 후손으로 출생했습니다. 뉴저지 대학과 프린스턴 신학교에서 수학한 그는 34년 동안 프린스턴의 조직신학 교수직을 감당했습니다. 워필드는 경건과 실력을 겸비한 개혁파 신학자였습니다.
그가 강력히 주장했고 세상에 많은 유익을 준 그 교리체계는 결코 칼빈만이 가지고 있는 새로운 것이 아니었다. 이 교리 체계는……모든 개혁주의자들 공동의 소유였다. 이 교리 체계에 근거해서 개혁주의자들은 모두 자신들을 복음주의자라고 불렀으며 이 교리체계의 새로운 발견으로 우리가 종교개혁이라고 부르는 혁명이 일어났던 것이다. 칼빈은 이 진리체계의 창시자가 아니었다. 그는 제2세대의 한 사람으로서 이것을 물려받았을 뿐이다. 종교적 선생과 지도자로서 그의 중요성은 그가 각 교리의 가치와 상호관계를 정확하고 상세하게 파악하였고, 다른 사람과 달리, 개혁교회 공동의 이 교리적 보화를 조직적, 논리적으로 체계화하여 어떤 공격에도 넘어지지 않도록 했으며 성도들의 신앙생활에 영감에 불어넣을 수 있도록 했다는 데에 있다. 이런 의미에서 볼 때 우리는 진리를 체계적으로 조직했다는 점에서 그에게 최고의 감사와 찬사를 보내야 할 것이다. 간단히 말해서 복음주의 운동에 체계적인 신학을 제공한 사람은 바로 칼빈이었다. 칼빈이 가르친 교리체계는 개혁주의자들 전체의 공동 소유인 바로 어거스틴주의였다.[B. B. Warfield, Calvin·Luther·Augustine, 한국칼빈주의연구원 편역, 『칼빈·루터·어거스틴』 (서울: 기독교문화협회, 1986), 39-40.]
프린스턴에서 가르치기 전, 웨스턴신학교에서 신약교수로 있기도 했던 워필드는 정규 박사학위 소지자가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마지막 구 프린스톤 신학자라고 불릴 만큼 탁월하게 자신의 직무를 감당했으며, 로이드 존스를 비롯한 많은 목회자들에게 영향을 끼쳤습니다. 자녀가 없었던 워필드는 강의를 제외한 대부분의 시간을 집에서 보냈습니다. 병약한 아내를 39년간 간호하면서 연구하고 글을 썼던 워필드는 환경을 극복하지 못하고 인내도 부족한 나 자신을 부끄럽게 합니다. 워필드의 작품을 읽읍시다. 참된 경건은 바른 앎으로부터 시작한다는 것을 배웁시다.
때로 우리는 십 분 기도하는 것이 열 시간 책 읽는 것보다 더 참되고, 더 깊으며, 더 실제적인 하나님 지식을 제공해 줄 것이라는 말을 듣는다. 이 말에 대한 올바른 답변은 이것이다. “뭐라고! 기도하는 마음으로 열 시간 책을 읽는 것보다 낫단 말인가?” 어째서 책을 시작할 때는 하나님을 잊어버려야 하는가? 또는 어째서 하나님을 의지하기 위해서는 책 읽기를 그쳐야 한단 말인가? 만약 이처럼 학문과 경건이 적대적이라면, 지적 생활은 그 자체가 저주일 것이고, 신학생의 종교 생활에서도 마찬가지일 것이고, 신학 자체가 저주일 것이다. 신학생은 단지 학생이라는 이유만으로 자신의 경건이 방해를 받을 것이다……그러나 여기에 ‘양자택일’(신학생이냐, 경건한 하나님의 사람이냐)은 존재할 수 없다. 우리는 둘 다여야 한다.[Fred G. Zaspel, The Theology of B. B. Warfield: A Systematic Summary, 김찬영 역, 『한 권으로 읽는 워필드 신학』 (서울: 부흥과개혁사, 2014), 926-27에서 재인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