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C. 152년 하스몬 왕가의 요나단이 왕직에다 대제사장직까지 겸하자, 소위 '경건한 사람들'(히브리어로 '하시딤')이 이에 반기를 들었다. 그 가운데 평신도들이 중심이 되어 바리새파를 형성하게 되었고, 일부 제사장들은 에센 파를 조직했다. 그러나 대부분의 제사장들 즉 사독의 후손이라고 하는 사람들과 예루살렘의 고위층은 하스몬 왕가와 헤롯 왕에게까지 동조하여 사두개 파를 조직했다. 이들 사두개파는 현세주의자들로 이스라엘의 상류 계급에 속했다. 그들은 모세 오경만을 인정하며, 내세와 부활과 천사의 존재 등을 부인했다(행23:8) 그런데 부활 사상은 당시 바리새파의 주장이자, 동시에 유대교의 경건한 신도들에 의해 널리 받아들여진 신앙이었다. 율법의 세목(細目)까지도 철저히 지킨다는 형식적인 순수함을 근거로 해서 다른 사람들로부터 자신들을 우월적(優越的)으로 분리시켜 특수층으로 자처한 사람들이다. 그리스 시대의 경건주의자인 하시데아(하시딤)파(派)를 계승 ·발전시킨 일파로 알려졌다. 신약성서 시대에 바리새 파는 사두개 파와 갈등을 빚고 있었는데, 그것은 사두개파가 천사나 영혼의 존재를 믿지 않고 구비전승(口碑傳承)도 부정한 데 반하여, 바리새파의 가르침은 율법과 동시에 구비전승에 바탕을 둔 것이었기 때문이다. 그들은 육체의 부활이나 천사의 존재 등을 믿었는데, 이런 내용들이 모세 오경(五經)에 분명히 언급되어 있지 않았기 때문에 후대의 저작들과 구비전승에서 그 원천을 찾으려 하였다. 윤리면에서 바리새파는 안식일을 엄격히 지킬 것과 십일조(十一租) 등을 가르쳤다. 이들의 엄격함과 결의론적(決疑論的)인 가르침은 때때로 참된 신앙심을 깨뜨리는 형식주의에 빠지기도 하였다. 예루살렘이 파괴되고 이스라엘이 망한 후에 그들은 유대인들 사이에서 영향력 있는 집단으로 남았다. 그 후 몇 세기 동안 그들은 유대인을 하나로 일치시키는 데 주역을 담당하였는데, 후대의 랍비들은 바리새파를 이스라엘 율법과 전통의 진정한 옹호자로 찬양하였다. 《탈무드》의 랍비들은 바리새파의 정신적 후예들이었다. 그래서 세례 요한이나 예수님의 비난의 적(的)이 되었다. 예수님 바리새파의 율법적인 전통의 많은 부분을 거부하고(마르 7:1∼23), 사람들을 그 무거운 짐으로부터 자유롭게 하여 주어(마태 11:28∼30), 그들에게 율법의 보다 심오한 의미를 가르치고자(마태 5:20∼48), 형식적인 신앙을 통렬히 비난하고(마태 6:1∼18, 23:5∼12), 예수님 자신으로부터 구원이 성취되리라고 가르친(마르 10:45) 사실 등은 바리새파와의 갈등을 불가피하게 하는 결과를 가져왔으며, 결국은 혹세무민(惑世誣民)한다는 죄목과 하나님을 모독하는 참람한 사람으로 십자가에 목박으라고 본디오 빌라도에게 주문했던 사람들이다. 1. 사두개인들 '사두개인들'은 초대교회 당시 집권 여당세력으로서 진보 헬라주의를 표방하였다. 구전 전승의 구속력과 권위를 부정하여 모세 오경만을 정경으로 인정하였고, 바리새파보다도 더 문자적으로 해석하였다. 레위인의 정결의식과 제사의식, 그리고 인간의 자유의지를 강조한 반면, 모세오경에 없다는 이유로 내세, 부활, 영적세계, 천사와 마귀 등의 존재를 믿지 않았다. 이 당시 대제사장들, 성전 맡은 자, 제사장들이 사두개인들이었고, 공회원의 상당수가 사두개인이었다. 이들이 사도들의 부활에 관한 설교를 싫어한 것은 너무도 당연하다. 사두개파는 다윗왕 당시의 제사장 사독(삼하 8:17)의 이름에서 기원된 것으로 보인다. 사독의 후손들은 마카비 전쟁 당시까지도 제사장을 지냈다. 이 집단은 바리새파와 마찬가지로 하스몬 왕족 때(주전 166-63) 구체적인 집단으로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하여 주후 70년 예루살렘 멸망과 함께 종적을 감추었다. 귀족 출신의 제사장들 사이에 유행하였다. 사두개파는 요한 힐카누스(주전 134-104년) 때부터 그의 아들 알렉산더 얀네우스(주전 103-76년) 때까지 정권을 장악하였다. 예수의 때와 사도들 때에도 사두개파가 집권하였다. 2. 바리새파 '바리새파'는 보수 유대주의로서 주전 2세기경 '하시딤'파(Hasidim)에서 생겼다. 하시딤은 '경건한 자들'이란 뜻으로서 유대지방을 통치하던 에피파네스 안디옥쿠스 4세(Antiochus Epiphanes/ 주후 175-164)의 반유대교주의 헬라화 정책에 반대하여 투쟁한 그룹이었다. 당시 안디옥쿠스 4세는 유대교 말살 정책을 펴, 성경을 금하고, 성전에 우상을 세우는 등 유대인들에게 혹심한 종교적인 박해를 가했다. 바리새파란 이름이 쓰이기 시작한 것은 요한 힐카누스(John Hyrcanus/주전 134-104; 마카베오상 2:42) 때였다. 바리새파들은 모세 율법이외도 각종 구전 전승을 정경과 동일하게 취급하여 구전의 구속력을 인정하였다. 예정과 자유의지를 주장하였고, 영혼 불멸, 몸의 부활, 영혼의 존재, 천사와 마귀의 존재, 사후 상벌, 성경의 영감설, 죽은 자의 미래, 인간의 평등을 믿었으며, 주로 원리적인 가르침에 치중하여 민중 속에 깊이 파고들었다. 바울도 바리새파였다. 율법을 중시하는 바리새인들은 당시 민중들의 존경의 대상이었다. 민중과 밀착된 그들의 교리는 신약성경에 자주 등장하여 예수의 비판을 받았다. 그들의 교훈은 신학적인 면보다는 윤리적인 면이 강했다. 바리새파 계통의 대제사장들이 유대인을 통치한 것은 안디옥쿠스 4세에 대항하여 독립을 쟁취한 맛다디아와 그의 아들들(하스몬가/주전 167-166년)의 때부터 요한 힐카누스(주전 134-104년) 때까지이다. 요한 힐카누스는 바리새파 엘르아살이 대제사장 직에 도전을 해오자 이에 격분하여 사두개파와 손을 잡았다. 힐카누스의 아들 알렉산더 얀네우스(주전 103-76년)의 죽음 이후에는 다시 바리새파가 정권을 장악하였다. 알렉산더 얀네우스는 반역군 바리새파를 색출하여 800명의 랍비들을 십자가에 처형하였다. 그러나 그가 죽을 때에는 바리새파의 등용을 유언하였다. 얀네우스의 두 아들인 힐카누스 2세는 바리새파와 손을 잡고 대제사장과 왕위를 지켰다. 그리고 아리스토불루스 2세는 사두개파와 손을 잡고 국군 통수권을 맡았다. 3. 엣세네파 '엣세네'파는 아마도 바리새파와 같은 하시딤에서 유래하여 나중에 바리새파와 분리되었을 것이다(마가비상 2:42; 7:13). 이들은 마카비(맛다디아의 아들 유다)와 함께 시리아 군에 반역하였던 열정적이고 엄격한 유대인들이었다. 주전 1세기말에 사해 근처 엔게디에서 큰 집단을 이루었으며, 예수 당시에는 약 4천명 가량이 유대에 살고 있었다. 그러나 엣세네파는 주후 70년 이후에 사라졌다. 성서는 엣세네파에 대해서 침묵하고 있으며, 일부 학자들은 세례 요한이나 예수도 엣세네파에 속한 인물들이었을 것으로 추측한다. 사해 사본이 발견된 1947년까지만 해도 엣세네파에 대해서 잘 알지 못했다. 그들은 토라의 율법을 엄격히 준수하였고, 재산의 공유권을 주장하여 하나의 공동체 사회를 이루었다. 상호간의 강한 책임의식과 성경연구를 중시하였으며, 많은 성경을 복사하였다. 경건과 순종에 대한 엄숙한 서약을 하였다. 그들은 예물을 절기나 성일 때에 바쳤지만, 동물희생을 바치지 않았고, 성전 제사에 참석치 않았다. 결혼을 피하고, 운명이나 별점, 천사를 숭배한 흔적도 있다. 전쟁에 참가하지 않았으며, 상업을 피하고 농업에 의존하였다. 모래침례를 행하였고, 유월절은 며칠 앞당겨 화요일에 지켰다. 매우 엄격하고 의식적인 생활을 하였으며, 긴 묵상과 예배를 중시하였다. 4. 헤롯당 '헤롯당'은 헤롯의 지지자들이다. 부유하고 영향력 있는 정당원들이었다. 5. 열심당 주전 6년 헤롯 대왕 당시에 출현해서 주후 73년 사해 근처 마사다에서 멸절되였다. 이들은 로마제국에 세금 내는 것을 반대하였고, 팔레스틴에서의 헬라어 사용을 반대하였으며, 구원의 때의 도래를 예언했던 민족 해방 운동가들이었다. 티투스가 주후 70년 예루살렘을 점령하였을 때에 일단의 열심당원들과 그 가족들이 사해 근처에 버려진 마사다 요새로 피신하여 로마군에 대항하였다. 이 요새에는 헤롯 대왕이 숨겨 놓은 많은 무기가 있었다. 유대 총독 플라비우스 실바가 군대를 동원하여 이 요새를 포위하고 흙을 쌓아 성으로 오를 수 있는 길이 197미터, 높이 55미터의 엄청난 경사로를 만들었다. 이 때 열심당원의 지도자였던 엘레아자르(Eleazar)는, "나의 진실한 친구들이여, 우리는 일찍이, 홀로 인간의 진실하시고 의로우신 주이신 하나님이외에 어떤 누구에게도, 특히 로마인들에게는 결단코 종이 되지 않기로 결심하였습니다. 이제 그 결심을 실행에 옮겨야 할 때가 왔습니다. . . ."라는 연설로 사람들을 설득하여 모든 가장들로 하여금 가족들을 살해하도록 하였다. 그리고 집안의 가장들은 제비로 열 사람을 뽑아 남은 자들을 죽이도록 하였다. 그리고 남은 자 한 사람은 요새에 불을 지르고 난 후에 자결하였다. 이렇게 죽은 자들이 960명이었다. 이 날이 니산월 15일이었다. 여기서 살아 남은 사람은 노인 한 사람과 이 일을 미리 예견하고 다섯 자녀를 데리고 숨어 버린 엘레아자르의 친척 되는 한 여인 뿐이었다. B.C.4세기경부터 헬라 문화권의 강력한 맹주였던 마게도냐의 빌립 2세와 그의 아들 알렉산더대왕(Alexander the Great)의 활발한 정복 활동으로 헬레니즘 문화권이 확장되어 헬라어도 소아시아, 시리아, 팔레스틴, 그리고 심지어는 이집트의 내륙 지방까지 널리 보급되었다. 알렉산더 대왕이 죽은 이후 로마가 헬라지역을 정복한 후에도 로마인들은 헬라인의 언어와 문화에 대한 경 외 감과 상업적인 목적에 사용될 세계적 공용어의 필요성 때문에 로마 제국 내에서도 라틴어 보다 표현이 풍부한 헬라어를 공용어로 사용하게 만들었다. 코이네 헬라어의 특성 알렉산더 대왕의 동방 원정에 의해 고전 헬라어를 기초로 형성되기 시작한 코이네 헬라어는 그 완전한 틀이 갖추어 지기까지 여러 지역에서 장시간의 점진적인 변화를 겪어서 형성된 것이다. 따라서 고전 헬라어. 즉 아틱 헬라어에 비해 코이네 헬라어는 어휘 및 구문법에서 다음과 같은 특성을 갖는다. 1) 어휘, 어형적 특징 첫째는 라틴어의 영향을 받아 새로운 낱말이 만들어졌다는 것이다. 그 이유는 알렉산더 대왕의 치세로 그 전성기를 맞이했던 헬라 제국이 멸망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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