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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1년 8월 14일 장기려(張起呂, 1911-1995) 출생, "학력과 직급이 아닌 가족 수에 따라 월급을 책정하여 운전기사와 같은 급여를 받던 복음의원 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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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월 14일 “장기려, 당신 의사면허증이 있소?”

오늘은 장기려(張起呂, 1911-1995)가 태어난 날입니다. 1911년 8월 14일, 장기려는 평안북도 용천군 양하면 입암동 739번지에서 출생했습니다. 어린 시절 할머니 이경심에게 신앙으로 양육 받은 그는 송도고보와 경성의학전문학교, 나고야제국대학교에서 수학했습니다. 장기려는 기홀 병원, 평양도립병원, 김일성대학 등에서 근무하던 중 6·25 전쟁을 맞아 피난하였고, 부산에서 복음병원 복음진료소를 설립하여 인술(仁術)을 베풀었습니다. 1968년에 국내 최초의 의료보험인 부산 청십자의료협동조합을 창설하여 소외되고 가난한 자들을 위해 봉사했던 장기려는 ‘바보 의사’, ‘한국의 슈바이처’ 등으로 불립니다. 그는 진실함에 큰 가치를 부여했던 성도였습니다.

장기려 선생은……감출 것이 없는 삶을 살았고, 어떤 상황에서든 있는 그대로를 드러냈다……선생은 1988년에 열렸던 부산외과학회 좌담회에서 이렇게 고백한다. “영도에서 조그마한 병원 할 때의 일입니다. 개복 수술을 하는데 비장 쪽에 종양이 있었어요. 그것을 떼겠다고 손을 대었다가 비장이 자연 파열되었습니다. 그런데 피가 너무 많아 출혈점을 잡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때 내가 너무 당황했나 봅니다. 그래서 제대로 처리하지도 못하고 수술대 위에서 운명하셨습니다. 그래, 내게 책임이 있다고 생각되어 경찰서에 가서 사실대로 얘기를 했습니다. 그러니까 그때 이야기를 듣던 경찰관이 ‘당신 의사면허증이 있소? 면허증이 있는 의사가 환자를 수술하다가 죽었는데 그걸 어떻게 하겠소. 할 수 없지 뭐’하여 무사히 넘겼습니다.”[지강유철, 『장기려, 그 사람』 (서울: 홍성사, 2006), 33-34.]

병원비가 없어 퇴원하지 못하는 환자를 밤에 몰래 도망치게 해 준 사람, 학력과 직급이 아닌 가족 수에 따라 월급을 책정하여 운전기사와 같은 급여를 받던 복음의원 원장, 고신대학 복음병원 옥탑에서 검소하게 지냈던 어른, 같이 남하하지 못한 아내 김봉숙의 사진을 침대머리에 두고 재혼하지 않았던 남편, 국내 최초로 대량 간 절제에 성공한 명의(名醫), 형편이 어려운 자들의 진료를 위해 발버둥 쳤던 막사이사이상 수상자, 선약을 지키기 위해 전두환 대통령의 만남 제안을 거절했던 사람 장기려. 그에 대한 수식이 이리도 길건만 나는 아직도 왜 그가 장로로 있던 교회를 뒤로 하고 ‘종들의 모임’에서 재세례를 받았는지 이해하지 못합니다. 하지만 나 역시 스스로 납득이 되지 않는 일의 주동자이므로 오늘 태어나신 어르신의 덕스런 행실을 더 닮고자 합니다.

1985년 9월 그는 정부로부터 북한 방문을 제안 받았다. 남북 고향 방문단 및 예술단이 서울과 평양을 오갈 때 그에게 특혜를 주려던 것이었다. 하지만 그는 그 제안을 거절했다. “내가 평양에 간다면 그곳에서 내 생명이 다할 때까지 함께 살 수 있든지 아니면 내가 아내를 데리고 남쪽에서 살 수 있든지, 두 가지 가운데 하나라면 가겠지만 이도 저도 아니라면 사양하겠습니다.” 이북에 가족을 두고 온 사람이 많은데 자신만이 그런 특혜를 받을 수 없다는 뜻도 있었다. 세상을 떠나기 직전 그는 아내에게 전해 달라는 마지막 말을 남겼다. 그것은 두고 온 2남 3녀의 자식들을 잘 키워준 것을 감사하면서 하늘나라에서의 영원한 만남을 기약한다는 내용이었다.[박성래, 『인물 과학사』 (서울: 책과 함께, 2011), 248-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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