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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ng.Sub] 창세기 49장 [우리말성경] Genesis 49 [네 아버지의 하나님께서 너를 도우시고] "The scepter will not depart from Juda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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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셉은 어려운 상황 가운데서 흔들리지 않고 견고히 서 있었고, 유연하게 서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그것이 요셉의 뛰어남이나 능력에서 온 것이 아니었다는 사실입니다. 요셉은 힘이 없었습니다. 그는 아무런 힘도 행사할 수 없는 노예였습니다. 그는 눌리면 눌리고, 가두면 갇히고, 모함하면 쓰러질 수밖에 없는 아무런 힘도 없는 존재였습니다. 그의 힘은 하나님에게서 나오는 힘이었습니다. 여기에서 중요한 단어는 영어로 하면 ‘but’과 ‘because’입니다. 세상이 갈수록 어렵고 답답합니다. ‘그러나!’(but) 그는 그것을 이길 힘이 있었고, 유연하게 그것을 대처해 나갔습니다. ‘왜냐하면’(because) 전능하신 하나님의 손이 그를 붙들고 계셨기 때문이고, 이스라엘의 반석이 되시는 목자께서 그를 돌보셨기 때문입니다. 그의 힘은 다른 곳에서 온 것이 아니라 그의 아버지의 하나님께서 목자가 되셔서 힘을 주셨기 때문입니다. 위로 하늘의 복과 아래로 깊은 샘의 복, 젖 먹이는 복, 태의 복을 주시는 전능하신 하나님 때문이었습니다. ‘엘 샤다이’의 하나님! 못하실 것이 없으신 전능하신 하나님을 지칭할 때 구약의 성도들은 ‘엘 샤다이!’ 하고 외치고 있는데 야곱과 요셉도 그것을 외쳤습니다. 지금 야곱은 사랑하는 아들 요셉을 이렇게 축복합니다. ‘요셉아, 너는 샘 곁의 나무로 살아라. 엘 샤다이의 하나님을 신뢰하는 믿음으로 승리해 무성한 가지가 되거라.’ 요셉이 누렸던 이 복을 우리도 누릴 뿐만 아니라 우리의 자녀들에게도 물려줄 수 있어야 하고 세상에 전해야 합니다. 요셉이 누렸던 그 복은 풍성함의 복이요, 생명의 복이었습니다. 다음 세대를 세우는 복이었습니다. 이는 가뭄에도 쇠하지 않고, 시간이 갈수록 더욱 힘이 생겨나는 싱싱함의 복이었습니다. 신명기에서는 모세를 통해 요셉 지파, 그를 통해서 허락된 두 지파에게 주어진 복을 이렇게 기록합니다. “요셉에 대하여는 일렀으되 원하건대 그 땅이 여호와께 복을 받아 하늘의 보물인 이슬과 땅 아래에 저장한 물과 태양이 결실하게 하는 선물과 태음이 자라게 하는 선물과 옛 산의 좋은 산물과 영원한 작은 언덕의 선물과 땅의 선물과 거기 충만한 것과 가시떨기나무 가운데에 계시던 이의 은혜로 말미암아 복이 요셉의 머리에, 그의 형제 중 구별한 자의 정수리에 임할지로다”(신 33:13~16). 하늘에서 풍성하게 내리는 이슬의 복, 이것은 모든 생명체를 힘 있게 자라게 하는 하늘의 보물이라고 말합니다. “땅 깊이에 저장된 물”, 이것은 메마른 중동 땅에서는 얼마나 크고 놀라운 복입니까? 영원히 이어지는 선물들이 내려올 것이라고 말합니다. 메마른 땅, 가시떨기나무에서 패배한 인생을 살고 있던 모세를 부르시고, 만나 주신 하나님에게서 오는 축복이었습니다. 모세는 그가 부름받았던 40여 년 전의 때를 생각하면서 “가시떨기나무 가운데에 계시던” 하나님이 그들의 인생을 높여 주시기를 축복합니다. 나이가 들어가면서 흰머리를 세고, 주름살을 세고, 깊어 가는 인생의 시름을 세면서 살 수 있습니다. 모세도 그럴 수밖에 없는 신세였습니다. 그러나 광야 가시떨기나무 가운데서 만난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그는 찬란한 생애를 살게 되었습니다. 이것이 우리의 젊은 날의 이야기가 되고, 우리 인생 중반부와 후반부의 이야기가 되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담을 넘는 무성한 가지 우리 그리스도인의 삶의 이야기는 여기에서 끝나서는 안 됩니다. 요셉은 그런 축복을 받아 혼자서 잘 먹고 잘 살다가 끝나는 인생을 살지 않았습니다. 가장 중요한 말씀은 그 샘 곁에 심긴 무성한 가지와 같은 인생이 그것으로 끝난 것이 아니라 ‘그 가지가 담을 넘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그리스도인들이 누릴 복입니다. 감당해야 할 사명입니다. 무엇을 위해(what for) 무성하게 하셨을까요? 무엇을 위해서 하나님이 축복해 주셨을까요? 무엇을 위해서 오늘 나에게 이 은혜를 베푸셨을까요? 요셉은 그것을 분명히 알고, 하나님의 원하시는 뜻을 이루어가는 삶을 살았다는 말씀입니다. 하나님께서 노예 요셉에게 눈길을 두신 이유가 무엇이었을까요? 감옥에 갇히더라도 타협하지 않고 믿음을 지키려고 애쓰는 한 젊은이를 주목하신 이유가 무엇이었을까요? 왕이 아니고서는 아무도 꺼낼 수 없는데 왕은 그를 알지 못하고, 왕의 측근은 다 잊었는데도 그를 비상한 방법으로 끌어내신 이유가 무엇이었을까요? 그와 함께하셔서 형통하게 하신 이유가 무엇이었을까요? 도무지 꿈도 꿀 수 없는 총리의 자리에까지 그를 끌어올리신 이유가 무엇이었을까요? 한 가지였습니다. ‘하나님의 놀라운 구원의 역사를 위해, 하나님의 사랑을 온 세상에 드러내시기 위해서’입니다. 요셉은 그것을 분명히 알고 있었고, 생애 가운데서 그것이 이루어지기를 꿈꾸었습니다. 요셉은 고난으로 얼룩진 생애에서 자신을 향한 하나님의 뜻을 온전히 깨닫고 그 꿈을 향해 달려가, 하나님의 목적을 위해 아름답게 쓰임받았던 사람이었다. 그래서 아브라함 요수아 헤셀은 “하나님을 믿는 것은 그분의 꿈을 우리의 꿈으로 간직하는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하나님, 우리를 복을 내려주시옵소서. 샘 곁의 무성한 가지와 같은 복을 우리 일생에 내려주옵소서!’ 요셉의 가지가 담을 넘었고 다른 사람도 그 결실을 맛보게 되었습니다. 야곱은 담을 넘는 놀라운 축복을 사랑하는 아들 요셉에게 축복으로 물려줍니다. 그로 인해서 형제들이 살게 되었고, 아직은 미미하게 보이는 하나님의 구원을 위해 세우신 이스라엘의 열두 지파가 함께 살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흉년 가운데 있는 애굽과 근동 사람들까지 살리는 역사를 감당합니다. 그리스도인에게는 이런 축복이 주어졌고, 이런 사명이 주어졌습니다. 요셉의 수레과 회복 요셉이 인생의 충분한 대답이 되시는 하나님만을 바라보며, 그분에 대한 믿음을 붙잡고 나아갔을 때 하나님께서는 그곳에서 일하셨습니다. 이제 요셉은 자신에게 주어진 축복, 은혜, 모든 삶의 조건들을 동원해 사람을 살리고 세우는 일을 위해 달려갑니다. 그는 모진 흉년에도 아버지의 가족들이 70명이라도 다 먹여 살릴 수 있는, 담을 넘는 큰 가지가 되었습니다. 성경은 그 아들들, 그 손자들, 딸들, 손녀들이라는 표현을 반복해 사용하면서 그것을 강조하고, 그들의 수가 아주 많았음을 강조합니다. 대가족인 야곱 일가가 가뭄으로 큰 어려움 가운데 있었습니다. 오랜 흉년에 굶어 죽을 수밖에 없는 상황에 처했습니다. 요셉은 그들을 바로 애굽으로 초청했습니다. 그는 온 애굽 국민을 먹여 살리고 근동의 굶주린 사람들까지 먹여 살릴 수 있는 큰 나무가 되었습니다. 힘겹게 인생의 고난의 장벽을 넘어가던 ‘담쟁이 요셉’은 이제 ‘무성한 가지’가 되어 담을 넘었습니다. 창세기 45장 후반부에는 형들에게 자신을 밝히고 아버지와 가족들을 모시고 애굽으로 건너오도록 초청장을 주어서 보내는 장면이 묘사되어 있습니다. 선물도 함께 보냅니다. 아버지를 모실 수레도 준비되었습니다. 오가는 길에 먹을 양식도 줍니다. 그러면서 형들에 대한 마음 따뜻한 배려도 잊지 않습니다. “이에 형들을 돌려보내며 그들에게 이르되 당신들은 길에서 다투지 말라 하였더라”(24절). 얼마나 아름다운 배려입니까? 형제들의 죄책감, 후회, 부끄러움과 미안함 등을 배려한 마음입니다. 하나님이 하셨으니 서로 탓하지 말라는 당부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세워진 인생을 감사하면서 사는 사람만이 가질 수 있는 여유요, 배려입니다. 이렇게 해서 회복되는 한 가정의 이야기가 참 아름답지 않습니까? “족하도다 내 아들 요셉이 지금까지 살아 있으니 내가 죽기 전에 가서 그를 보리라”(28절). 나이 들어 노년을 살고 있는 야곱의 생애에 이렇게 기뻤던 적이 언제였습니까? 놀랍게도 아들이 보낸 수레를 보는 아버지의 이름은 ‘야곱’으로 나타납니다(45:27). 그런데 그 다음 구절은 ‘야곱’이라는 이름 대신에 하나님이 지어 주신 이름인 “이스라엘이…”라고 표현됩니다. 46:1에도 다시 ‘이스라엘’로 지칭됩니다. 하나님 앞에 서 있는 야곱과 그의 가정의 회복된 모습을 보여 주기 위해서입니다. 아들의 배려를 통해 아버지 야곱의 인생이 회복되고, 상처투성이였던 가정이 세워집니다. 그리고 야곱은 모든 소유를 이끌고 살던 곳을 떠나 애굽을 향하다가 브엘세바에서 하나님께 예배를 드립니다. 그는 그곳에서 하나님을 대면합니다. 아들을 잃어버리고 얼마나 상심했습니까? 그래서인지 그 이후 어디에도 하나님께 예배한 기록이 나오지 않습니다. 사랑하는 자식을 잃은 충격 속에서 20여 년을 보낸 아버지의 안타까운 모습이 요셉이 보낸 수레를 통해 회복됩니다. 여기에서 야곱의 가정이 회복되고 예배가 회복됨을 알 수 있습니다. 지금 여기에서 야곱은 하나님의 약속과 유업을 이루어 갈 영적 이스라엘로 회복됩니다. 요셉의 수레. 하나님 앞에 나아가게 하고, 예배하게 할 자원이 될 ‘요셉의 수레’와 같은 것이 우리 인생에도 있어야 합니다. 가정도 살리고, 형제도 살리고, 아버지도 살리고, 영적 사명도 깨닫게 하는 요셉의 수레와 같은 것이 우리에게도 있어야 합니다. 오늘 누군가에게 하나님의 역사하심을 깨닫게 하고, 상처에서 일어서게 하며, 하늘의 축복을 전하는 ‘요셉의 수레’와 같은 존재로 설 수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다스리심과 하늘로부터 허락하시는 축복과 생명이 생각나게 하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사람을 살리고, 가정을 회복하며, 나라와 민족을 세워 가는 사람으로 살도록 오늘의 축복과 은혜를 나에게 허락해 주셨습니다. 그렇습니다. 교회는 선교적인 교회여야 하고, 그리스도인은 선교적인 존재가 되어야 합니다. 우리는 세상에 하나님의 축복을 전할 존재로 세움받았습니다. 우리가 서 있는 그곳에 생명의 복음이, 하나님의 은혜의 보좌가 경험될 수 있도록 만들어 주기 위해 세움받은 존재들입니다. 오늘 우리는 하나님의 축복으로 이미 무성한 가지가 되었습니다. 오늘 대한민국은 그 모진 가난을 딛고 일어서서 하나님의 축복으로 우뚝 세워졌습니다. 한국 교회는 지난 100여 년 동안 그 모진 고난에도 민족을 세우는 일을 위해 그 사명을 잘 감당했습니다. 이제는 무성한 가지가 되었습니다. 중요한 것은 무성한 가지가 된 것으로 자만하지 말고, 자랑삼지 말고 담을 넘어 생명의 복음을 전하고, 만왕의 왕이신 하나님을 증거하는 일을 위해 부름받았다는 사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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