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24 바울은 본절에서 그리스도인들이 영광의 면류관을 얻기 위해서는 절제와 노력이 필요함을 권면하기 위하여 운동 경기를 비유로 들었다. 당시 고린도 지역에서 매 2년마다 열렸던 '이스미안 경기'(Isthmian games)가 올림피안 경기(Olympian games), 피티안 경기(Pythian games), 네미안 경기(Nemean games)와 함께 그리스 사대 경기 중 하나이다. 이스미안 경기에는 주로 격투기, 경마 등이 진행되었다. 운동장에서 - '운동장'에 해당하는 헬라어 '스타디오'(* )는 606.75피트(feet)로 약 200m 길이의 단위를 나타내는 말이다. 이것이 경기장, 곧 '스타디움'(Stadium)으로 뜻이 굳어졌다. 그 이유는 당시 그리이스 도시들에 있는 경기장들이 한스타디오(약 200m)로 규격화 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오직 상 얻는 자는 하나인 줄을... 너희도 얻도록 이와 같이 달음질하라 - 이 말은문자대로 육상 경기에서 오직 한 사람만이 상을 얻는 것처럼 고린도 교인들도 오직 한사람만 구원을 받을 수 있다는 뜻은 아니다. 당시에는 운동 경기에서 승리하면 상금을주지 않고 명예를 상징하는 월계관을 수여했는데, 모든 경주자는 이러한 명예를 획득하기 위해 경기에 참가했다. 따라서 바울이 의미한 것은 경기에서 우승자가 질주하는것같이 고린도 교인들도 상을 얻겠다는 목적 이외의 모든 것을 잊어버리고 그 목표만을 향해 노력하라는 것이다(Godet). =====9:25 이기기를 다투는 자마다 - '이기기를 다투는 자'에 해당하는 헬라어 '호 아고니조메노스'(* )는 동사 '아고니조마이'(* , '경쟁하다', '격렬히 몸부림치다')에서 파생된 말로서 본절에서는 경주에 참가하는 모든 자를 가리킨다. 모든 일에 절제하나니 - '절제'에 해당하는 헬라어 '엥크라튜에타이'(* )는 고대 그리스의 운동 경기자들이 사용했던 전문 용어였다. 그들은 통상 10개월 가량의 고된 훈련을 받았으며 음식이나, 오락, 수면 시간 등 모든일에 있어서 자신을 절제하여야 했다. 썩을 면류관을 얻고자 하되 - 고린도 지역에서 개최되었던 '이스미안 경기'에서는승자에게 월계수나 솔잎, 또는 어린 파슬리(parsley) 잎을 엮어 만든 화환(wreath)을머리에 씌워 주었으며 올림피안 경기에서는 우승자에게 야생 감나무 잎으로 엮은 화환을 씌워 주었다. 이처럼 나뭇잎을 엮어 만든 그런 면류관은 경기자들에게 최고의 영예(榮譽)를 상징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면류관은 금방 시드는 것이었고 그것을 쓴 우승자의 영예 역시 덧없는 것이다. 우리는 썩지 아니할 것을 얻고자 - 운동 경기자가 목표하는 면류관은 일시적인 것이지만 그리스도인들이 추구하는 면류관은 영원한 영광의 면류관이다. 따라서 그리스도인들은 운동 경기에 참여하는 선수들 못지 않게 세심한 주의를 기울여 그 목표를 향해 나아갈 만한 충분한 가치가 있다. =====9:26 향방 없는 것같이 아니하고 - '향방 없는'의 헬라어 '아델로스'(* )는 '목표 없는', '불분명한'의 뜻을 갖는다. 달리기 선수들이 목표와 방향을 분명히 정하고경기에 임하는 것을 비유로 삼으면서 바울 자신도 목표와 방향을 확고하고 분명하게인식하면서 신앙 생활을 하고 있음을 말한다. 싸우기를 - 이에 해당하는 헬라어 '퓌크튜오'(* )는 '퓌그메'(* ,'주먹')와 '퓌크테스'(* , '권투 선수')의 합성어이다. 따라서 이것은 '권투시합'을 가리킨다. 바울은 여기에서 달리기 경주에서 권투 시합으로 비유를 바꾸어 표현의 폭을 넓히고 있다. 허공을 치는 것같이 아니하여 - 이것은 권투 선수들이 시합을 하기 전에 상대방 없이 혼자서 연습하는 것을 표현한 말로 전문 용어로 '스키 아마키아'(* ,'싸움')라고 하였다. 바울은 자신의 영적인 싸움이 상대방이 없는 공허한 것이 아니라분명한 대적(對敵)이 있는 싸움이라는 사실을 염두에 둔 것 같다. =====9:27 내가 내 몸을 쳐 - '쳐'에 해당하는 헬라어 '휘포피아죠'(* )는 '휘포'(* , '...아래')와 '옵스'(* , '눈')의 합성어로서 문자적으로는 '눈 아래 부위를 친다'라는 뜻이다. 이 말은 매우 사실적인 표현으로서 당시 권투 선수들이상대방의 얼굴 부위를 공격하는 광경을 묘사한 것이다. 바울은 이러한 권투 시합을 연상하면서 자신의 싸울 대상이 자기 몸이 라는 것을 보여준다. '몸'에 해당하는 '소마'(* )는 고린도전, 후서에서 '영'과 상반되는 개념으로 주로 사용되었다. 본절에서는 세속적이고도 육체적인 욕구를 제어하여 그리스도를 섬기기 원하는 자신의의지를 나타내고 있다. 복종하게 함은 - 이에 해당하는 헬라어 '둘라고고'(* )는 '둘로스'(* , '종', '노예')와 '아고'(* , '데려오다', '끌고 오다')의 합성어로서전쟁에서 승자가 패자를 종으로 끌고 오는 것을 뜻하는 말이다. 이것은 바울이 자신의몸을 쳐서 패배시킨 후 이제는 온전히 복종시켜 종이 되게 하였다는 말이다. 바울은그의 육체적인 본성뿐만 아니라 정신적인 죄의 성향과 욕망까지 복종시키려고 하였다(Hodge). 남에게 전파한 후에 - '전파한'의 헬라어 '케뤽사스'(* )는 헬라어 '케뤽스'(* , '전달자')에서 유래하였다. 운동 경기에서 '케뤽스'의 임무는 경기규칙을 설명하고 선수들을 소집시키며 나팔을 불어 시합의 시작을 알리는 일 등을 하였다. 바울은 복음을 전하는 자신의 모습을 전달자인 '케뤽스'에 비유하였다. 자기가 도리어 버림이 될까 - '버림'에 해당하는 헬라어 '아도키모스'(* )는 '도키마조'(* , '조사하다', '시험하다')에서 파생된 말로서 '불합격자'의 뜻을 갖는다. 또한 이 단어는 옛날 화폐로 사용된 주화의 무게를 달아서 제 무게를 지닌 주파와 그렇지 못한 불량 주화를 가려내는 것과 관련하여 자주 사용되었다.바울이 버림받는다고 하는 것이 구체적으로 무엇을 가리키는지에 대해 두가지 해석이나올 수 있다. (1) '구원을 받지 못하고 버림받는다'는 의미이다(Lenski, Godet). (2)구원에서 제외되는 것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상급을 받지 못한다'는 것이다(Morris).위의 두 견해 중 후자가 타당한 듯하다. 바울은 자신이 구원 얻은 자로서 주님을 마땅히 섬기지 못할까 두려워한 것이다. 고전 9:24 운동장에서 달음질 하는 자들이 다 달아날지라도 오직 상 얻는 자는 하나인 줄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너희도 얻도록 이와 같이 달음질하라. - 여기서 바울은 헬라의 알렉산더 대왕 이후 헬라 각처에 풍속이 되어 있었던 경주회(競走會)를 염두에 두고 신앙 생활을 비유한 것이다. 신앙 생활을 경주에 비유한 것은 신약 다른 부분에도 있으니 히 12:1-4;빌 3:10-14;딤후 4:7,2:5 등이다. 이 모든 말씀들을 보면 경주 하는 자가 법대로 하여야 된다는 것, 푯대를 향하여 달음질 하여야 된다는 것, 승리한 사람들이 앞서 가서 지금 구름과 같이 많은 수효로 하늘에 있다는 것 등을 생각하게 한다. 여기서는, 특별히 상을 얻는 자가 전수가 아니고 합격(合格)된 자 뿐이라는 것이 역설되어있다. 여기 이른바 "하나"라는 수효가 이 비유의 요점은 아니다. 물론 신령한 세계에 있어서 구원을 향하여 달음질하는 자들 중에 구원의 상급을 받을 자가 하나 뿐이라는 의미를, 이 비유가 가르치지 않는다. 고전 9:25 이기기를 다투는 자마다 모든 일에 절제하나니 저희는 썩을 면류관을 얻고자 하되 우리는 썩지 아니할 것을 얻고자 하노라. - 이 비유에 있어서 이긴다는 것은, 다른 사람과 대항하여 이긴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고 보이지 아니하는 사단의 권세를 대항하여 이기는 것을 가르쳤다는 것이 그 요점이다. 여기 "절제"한다는 말 뜻은 극기(克己)를 의미 하는데, 그때에 경주자들이 경주를 앞두고 미리부터 음식을 먹는데 있어서나 잠자는데 있어서 일정한 규칙을 지키며 특별히 향락 생활을 제지(制止)하였다. 그와 마찬가지로 기독자의 승리는, 다른 사람들에게 달려 있는 것이 아니고 인간편에서는 자기 자신에게 달려 있는 것이니 그는 무슨 일에 있어서나 수원 수구(誰怨誰咎)로 다만 주님이 주시는 힘을 구하여 받아가지고 극기(克己)하는 데 힘써야 될 것이다. 그의 극기 생활은, 결단코 이교도(異敎徒)들이 가지는 소망 없는 고행주의 생활(苦行主義 生活)이 아니고 즐거움으로 주님의 계명을 지키도록 되어지며 또한 영원히 썩지 아니할 상급을 향하여 기쁘게 움직여 질 극기 생활이다. 바울이 이 비유에서 특별히 고조한 것은, 이 세상 사람들이 썩을 것을 구하기 위하여서도 모든 고생을 하며 달음질 하는데 하물며 썩지 않을 영생의 상급을 위하여서는 얼마나 더욱 고생하며 힘써야 될 것을 가르치는데 있다. 오늘날에도 많은 사람들이 썩을 것을 위하여는 죽기까지 한다. 고전 9:26 그러므로 내가 달음질 하기를 향방 없는 것 같이 아니하고 싸우기를 허공을 치느 것 같이 아니하여. - 여기서는 바울이 확실하지 않게 신앙 생활을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신앙 생활의 목적물(目的物)이 되는 구원은,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확실케 하셨으니 영원히 썩지도 아니하고 변치도 아니하는 것이다. 그러나 신자 자신이 그와 같은 견고한 구원을 목표함에 있어서 확실치 못하고 아직도 이 세상 것들을 애착하여 부동(浮動)하여 그 눈을 땅 끝에 둘 때에(즉 모든 허욕으로 움직일 때), 그는 실상 주여 주여 하지만, "방향 없이" 헛되이 행하는 자이다. 신앙 생활은 먼저 일정한 방향으로 생활을 단순화(單純化)하여 진실되이 정결하게(따라서 유력하게)움직이는 데서 비로소 성과(成果)를 거둔다. 바울은 이 귀절에 있어서 신자를 군인(軍人)에 비유한다. 그것도 신약 성경이 다른데서도 취한 표현법이다(딤후 2:4;엡 6:10-17;딤후 4:7;계 17:14,19:11-16). 신자가 이 세상에 처하여 있는 것은 접전 중(接戰中)에 있는 군사와 같다. 그는 대기하고 있는 병사(兵士)가 아니다. 그는 물론 재향 군인(在鄕軍人)도 아니다. 그 이유는 이세상은 바로 하나님과 사단과의 사이에 일어난 전쟁 마당이기 때문이다. 이 전쟁 마당에 있어서 완충지대(緩衝地帶)는 전연 없다. 하나님과 사단 사이에는 인간이 취할 만한 중간 처지가 없다.전쟁 마당에는 중간 처지(中間處地)라는 것이 전연 없다. 전쟁 마당에 있는 자는 생사(生死)를 결단하는 결심으로 어느 한 편에 속하여 싸워야 된다. 바울은 자기의 이와 같은 처지를 각성하고 마땅히 공격할 대상을 명중(命中)시켜 싸웠으니 그것은 곧 자기 몸을 쳐 복종시킴이다. 고전 9:27 내가 내 몸을 쳐 복종하게 함은 내가 남에게 전파한 후에 자기가 도리어 버림이 될까 두려워함이로라. - 여기 이른바, "몸을 쳐 복종하게"한다는 것은, 몸 자체가 죄가 되는 까닭이 아니다. 인간의 부패성과 또는 마귀가 우리의 몸을 충동시켜 죄를 범하도록 하는 것인 만큼, 결국 신자는 자기몸을 제지(制止)시켜야 된다. "쳐 복종하게" 한다는 것은 구타(毆打)하거나 파상(破傷)시킴을 의미하지 않고 다만 지배(支配)하며 견제(牽制)하는 행위를 비유하는 말 뿐이다. 이렇게 몸을 쳐 복종 시키는 일은, 인간이 자발적(自發的)으로 자기의 사상이나 행동을 잘 통솔(統率)하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고 하나님이 주시는 고난 밑에서 그 몸을 복종 시켜 성화 생활(聖化生活)에 전진(前進)함을 의미하기도 한다(시 119:67,71 참조). 그러나 바울이 여기서 주요하게 생각한 것은, 신자가 주님이 주시는 능력을 통하여 자기의 악한 생각의 충동을 죽이며 견제하여야 된다는 것이다. "내가 남에게 전파한 후에 자기가 도리어 버림이 될까 두려워함". 이 말씀 뜻은, 얼핏보면, 성경에 분명히 가르친 성도의 궁극적 구제(Perserverance of saints)의 도리, 곧, 하나님의 택한 자가 끝까지 구원받게 된다는 교리를 위반하는 것 같다. 그러나 그렇지 않다. 물론, 예수님이나 바울이 가르친대로, 택한 백성은 복음을 들어 거듭날 수 밖에 없고 거듭난 자는 영원히 구원에서 떨어지지 않는다는 것이다(요 10:28-29;롬 8:30). 그러나 성도의 궁극적 구원을 포함하는 구원 계획 때문에 기독자가 방심(放心)하는 것은 아니다. 기독자는 구원에서 떨어질까 두려워하는심정을 그의 인격 구성의 요소로 가진다. 하나님께서는 신자를 그렇게 만들어 죄를 멀리하게 하며 방심 하지 않게 하셨다. 이렇게 두려워 떨며 방심하지 않고 힘쓰는 자에게만 실상 확신과 희열을 가지도록 경륜하셨다. 주님을 두려워 하는 자가 실상 모든 참된 확신의 은혜를 받게 되는 것이다. 모든 방종스러운 자들은 하나님의 영적 사역(靈的 使役)을 받지 못하고 그 중심에 확신도 가지지 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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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항상 내 몸을 쳐 절제시킵니다. 다른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내가 정작 나 자신은 상 받을 자격을 박탈당하면 안 되기 때문입니다[고린도전서 9:24-27 설교, 강해 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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