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교도와 함께
감사
어떤 경우에도 하나님이 내려주시는 복을 바라보고 하나님의 자비와 약속과 아버지로서의 징계에 감사드리는 눈이 있습니다. “예수께서 눈을 들어 우러러 보시고 이르시되 아버지여 내 말을 들으신 것을 감사하나이다”(요11:41). 작은 새는 물 한 방울을 마실 때마다 마치 감사를 드리듯 하늘을 바라봄으로써, 자비는 게걸스럽게 취하면서도 자비를 주신 손길에 대해 결코 감사하지 않는 돼지 같은 성품을 사람들을 부끄럽게 합니다. 플라톤은 자신이 그리스인이고 아테네인이며 소크라테스학파인 것을 하나님께 감사했습니다. 테오도시우스는 자신이 그리스도의 지체가 된 것을 제국의 우두머리가 된 것보다 더 감사했습니다. 감사하지 않아도 될 만큼 작은 자비는 아무것도 없습니다. 그리스도가 오병이어로 주님을 바라본 것처럼 우리도 음식 앞에서 하나님을 바라봐야 합니다(막6:41). 에픽테토스는 밤낮으로 만족하며 노래하는 나이팅게일이 되기를 소원했습니다. 중생하지 않은 사람의 확실한 표지는 자비를 갈망하면서도 찬양을 드리는 일에는 느리고 둔하다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들은 말 못하는 귀신에 사로잡히게 됩니다. 분명 어떤 사람들은 하나님을 찬양할 입을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하나님을 찬양할 입이 없는 사람들은 탐욕스럽게 세상적 허영이라는 사라질 꽃들의 냄새를 맡습니다. 천국에 갈 때 우리와 함께 가는 것은 의무가 아니라 감사입니다. 훌륭한 사람은 복을 감사할 뿐 아니라 거룩한 욥처럼 눈을 들어 하나님이 주시는 아버지로서의 징계를 진심으로 찬양합니다(욥1:21). 누군가 말했듯이 만일 하나님이 자기 자녀를 채찍질 하실 때는 신실함과 자비 가운데 부드러운 가시로 하시며, 잠깐 자기 얼굴을 숨기셨다면 변치 않는 인자함으로 안아주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모든 그리스도인은 곤란을 당했을 때 어떻게 하면 인내할 뿐 아니라 감사할 수도 있는지를 알고 있습니다.
- 로버트 딩글리 [ROBERT DINGLEY, 1619–1660]